이세국 셰프
그를 꿈꾸게 한 결정적 장면
그는 어느 호텔의 로비를 보고 있다.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 조용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깨끗한 실내는 거울처럼 조명을 되쏘고, 고급스러운 소품들이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카메라는 어느덧 하이힐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여자를 뒤따른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하이힐의 굽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그만큼 실내는 조용하고, 그것이 마치 일상적인 분위기라고 대변하는 듯하다. 카메라는 다시 일인칭 시점이 되어 로비 끝을 향하고, 주방으로 통하는 커다란 철제문을 연다.
화면은 갑자기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지며 로비와는 사뭇 다른 온갖 소음과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누군가는 큰 소리로 나무라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강한 불이 솟구치고, 도마 위에서는 재료들이 잘려나간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수증기 속에서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셰프를 주제로 한 이러한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는 모습들이고, 익숙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결정적 장면일 수 있다.
이세국 셰프가 지금의 길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장면 때문이다.
“한창 답답하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호되게 맞은 같았죠.”
전쟁터 같은 주방의 열기는 어떤 미래를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그에게 해답처럼 다가왔다. 막연한 미래는 그에게 늘 두려운 대상이었지만 그날 그가 보았던 화면 속 주방의 모습은 치열함 그 자체였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바로 살아 있다는 것이 저것이구나, 하는 깨우침을 느낀 순간이다. 이세국 셰프가 고등학생일 때의 경험이고, 그 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한다.
“처음엔 셰프라는 직업이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학원을 다니며 조리를 공부했고, 결국 대학도 관련학과에 들어가 동양조리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호텔과 한식당, 일식당 등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그것은 경력을 위한 것이 아닌 경험을 쌓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러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조리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체코를 경유해 크루즈에 오르다
한 호텔에 입사한 그는 호텔측의 부당한 처사에 실망해 일을 그만두고 머리를 식힐 겸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 중 가이드로부터 체코에 위치한 한식과 일식을 취급하는 레스토랑을 소개받게 된다. 제법 규모가 있는 레스토랑이었고, 그로서는 한번 도전해볼 만한 곳이었다. 물론 레스토랑 주인에겐 26살의 젊은 셰프를 고용하는 일이 모험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돈을 벌기 원하십니까, 레스토랑을 살리길 원하십니까?”
젊은 셰프의 당찬 물음이 도전적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체코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주방의 모든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다. 주방의 구조는 물론이고 한식에 사용되는 수저 세트부터 뚝배기, 접시 할 것 없이 새로 오픈하는 수준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보름도 되지 않아 레스토랑에 변화가 찾아왔다. 주방의 분위기가 바뀌자 맛도 살아나기 시작했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결국 그의 말처럼 체코의 레스토랑은 살아났고, 지금은 2호점까지 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3개월 동안 몸무게가 30kg이나 빠졌다고 하니 그를 짓누른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귀국을 결심할 즈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체코에서 인연을 맺은 직원이 이탈리아 최대 선사인 코스타에서 크루즈 셰프를 모집한다는 얘기를 전해주며 지원해보라고 권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주방 막내로 생활하던 때를 떠올렸다.
크루즈는 그가 주방에서 양파를 다듬고, 청소를 하던 시절 막연하게 동경하던 세상이었다.
“크루즈 사진은 그저 저와 상관없는 세계였죠. 도대체 초호화 여객선이란 게 뭘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요리를 하고, 어떤 음식들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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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즈에서 만난 전 세계 셰프들 |
그가 한식 셰프로 오른 크루즈는 코스타 아틀란티카호, 빅토리아호, 네오로만티카호 등 총 세 척이다. 아틀란티카호만 하더라도 8만6천 톤의 여객선으로 승객 2천여 명에 직원만 7,8백 명이 넘는 초호화 여객선으로 분류된다. 그런 곳에서 이세국 셰프는 유일한 한국인 셰프로 근무해 호평을 이끌어냈다.
“크루즈에서 셰프로 일하는 것은 정말 큰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얻는 것도 많구요. 하지만 그만큼 힘들고, 견뎌야 할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물어본다면 한 번쯤 경험할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26살에 체코에서의 경험과 이후 3년간의 크루즈 생활까지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세프로 더 오래 생활한 특별한 경험의 소유자다. 어쩌면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들을 그는 우연한 기회를 실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실험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그 정도 스펙이라면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꿈꾸는 무대를 직접 꾸미려 한다.
▲ 염소자리 |
이세국 셰프는 염소자리에서 사람과의 소통과 공감을 주제로 음식을 만든다. 겉으로 보자면 얼핏 작아 보이는 그곳, 하지만 그는 분명 그곳을 초호화 여객선보다 더 풍요로운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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