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물에, 향은 기름에 잘 녹는다
[Cook&Chef = 권혁만 칼럼니스트] 음식의 맛과 향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에 마치 하나인 듯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렌지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오렌지 ‘맛’이 아니라 단맛과 신맛, 그리고 오렌지 향이다. ‘맛’에는 단맛, 짠맛, 감칠맛, 신맛, 쓴맛 이하 5미(5味)뿐이며, ‘오렌지 맛’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5미 외 모든 풍미의 다양성은 향에서 유래한다.
식품회사 연구원들은 맛과 향의 차이를 뚜렷하게 인지하고서 조미에 임하며, 식품업계에서는 맛과 향을 한 데 일컫는 말로 ‘향미(香味)’, 또는 풍미(flavor)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흔히 말하는‘쇠고기 맛’이란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미량의 짠맛, 감칠맛에 쇠고기 향이 함께 존재할 뿐이다.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사이의 풍미 차이 역시 향에서 기인한다.
맛 성분은 물에 잘 녹는다. 물에 녹아야만 맛으로 느껴진다. 향 성분은 기름에 잘 녹는다. 마늘 한 톨을 이용해 조리하는 경우에도 마늘의 맛 성분인 단맛, 감칠맛을 주되게 이용하고자 한다면 물에 마늘을 넣고 삶아 육수(마늘 육수에서도 미약하게 마늘의 향을 느낄 수 있다. 마늘 자체에서 유래하는 미량의 기름 성분이 육수 내부로 녹아 들어가기도 하고, 물에 녹는 향기 성분도 일부 존재하기 때문)를 낸다.
한편 마늘의 알싸한 향을 이용하고자 할 경우엔 마늘에 기름을 넣고 갈거나 끓여내어 그 향을 기름에 녹여준다. 이렇게 만든 마늘기름은 소스통에 담아 완성된 전이나 볶음 요리 위에 뿌려 내기도 한다. 육류 고유의 향도 지방에 녹아 있다. 기술적으로 살코기에서 지방을 완벽하게 분리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맛’은 인간이 먹는 목적 그 자체다. 맛은 인체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대량 영양소에 대한 보상 감각이다. 에너지원에 대한 감각인 단맛, 우리 몸의 건축 자재인 단백질의 존재를 예고하는 감칠맛 등… 한편 ‘향’은 ‘맛’이 존재하는 먹거리를 기억하거나 찾아 먹기 위해 느끼게 된 ‘나침반’ 같은 감각이다. 향은 음식의 풍미를 다채롭게 해주지만 단독으로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양 가치가 없다.
실제로 과일 향료를 물에 타서 마셔 보아도 과일 씻은 물과 같은 밋밋한 풍미가 느껴진다. 하지만 같은 향료 희석액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맛, 신맛 성분인 설탕과 구연산(레몬, 라임 등 주로 감귤류 과일에서 느껴지는 신맛.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맛 성분이며, 식초의 초산 신맛과 달리 pH5.0 부근에서 감칠맛 감각을 증폭시켜주는 경향이 있다. 한식 양념류 중에서는 매실청이 구연산 신맛을 낸다.)을 타서 마셔 보면 생생하고 강렬한 과일의 풍미가 느껴진다.
이렇듯 맛 성분은 재료의 ‘향’을 증폭시키거나 더 좋게 느껴지게 한다.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경쟁 업체와 같은 가격, 같은 양, 같은 종류의 식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훨씬 더 강렬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요리나 소스를 만들 수 있고, 음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일이나 허브(봄나물 포함)같은 상큼한 식재료들은 주로 단맛과 신맛에 의해 더 강하게 느껴지게 되고, 고기나 볶은 채소 등 일반적인 요리 재료들은 주로 짠맛과 감칠맛에 의해 더 강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실제로 ‘맛’ 없이 레몬향, 라임향 등이 들어있는 트레비 같은 가향 탄산수에 설탕만 8~10% 정도 타서 마셔봐도 그 향이 강렬하게 증폭되는 현상을 체험해볼 수 있다.
사실 특정한 맛이 식재료의 향을 증폭시켜준다는 말은 요리 주의적인 관점일 뿐이고, 사실은 우리의 뇌가 ‘맛’이 들어있는 먹거리의 향을 기억하고 또 찾아 먹기 위해 우리의 감각을 조종하는 것이다. ‘간을 맞춘다’는 것은 요리에 소금을 치는 행위를 아득히 넘어 재료의 향이 맛있게 느껴지게끔 5미를 다루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맛과 향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고기 요리에서 나는 잡내나 이취도 그저 다른 냄새로 덮으려는 시도밖엔 할 수가 없다. 마늘이나 생강, 후추의 향을 이용해 고기에서 나는 잡내를 가리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향을 향으로 덮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잘못 말려 냄새가 나는 빨래에 페브리즈를 아무리 뿌려 봐야 잡내를 덮을 수 없다. 빨래의 냄새는 결국 미생물에 의해 나는 것이며, 온수 빨래 등을 통해 냄새 발생의 원인인 균을 없애 주어야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육류 요리의 잡내를 잡고 싶으면 그 냄새를 다른 향으로 가리려는 시도를 넘어 근본적으로 잡내를 차단할 수 있는 수를 써야 한다. 실제로 과거 육류의 잡내를 억제하기 위해 진행했던 실험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후추나 마늘, 양파 같은 향신채와 숯불 향 등 그 어떤 ‘향’보다도 가장 효과적으로 육류의 잡내를 줄여준 것은 단맛이나 감칠맛 같은 맛 성분이었다.
불고기를 위한 소스, 수육을 삶는 데 쓰는 육수에 설탕, MSG, 핵산IG 등을 이용해 단맛이나 감칠맛을 강화(불고기 같은 양념육 요리의 경우에는 소스의 단맛을 5~10% 더 강하게 잡아준다. 수육의 경우에는 기존 사용하던 육수에 2~3%의 설탕과 1%가량의 핵산IG를 더 타준다.)해주면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고기의 잡내가 차단된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감각을 조정하는 것이다. ‘여기엔 대량의 에너지원과 단백질원이 있어, 다 먹어야만 하니까 잡내 따위는 느끼지 마’…
맛의 문제를 향으로, 반대로 향의 문제를 맛으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맛과 향의 화학적인 특성, 그리고 그 생물학적 의의에 대해 곱씹으며 조리에 임하다 보면 조미 능력을 대폭 향상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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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만(식품기술사) = ‘맛의 기술 REMASTERED’의 저자로 식품과 음식의 맛과 향의 원리를 현장 조리와 제조에 접목하는 식품기술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출신으로 샘표식품 연구원으로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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