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휘자가 아니었다면 요리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Cook&Chef = 이경엽 기자]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무대 위뿐 아니라 부엌에서도 예술을 실천해온 인물이다. 그리고 2025년 5월, 정명훈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이 그를 차기 음악감독으로 공식 발표한 것이다.
1778년 개관 이후 유럽 오페라의 심장으로 군림해온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아시아인이 음악감독을 맡는 건 247년 역사상 처음이다. 2027년부터 2030년까지의 임기 동안 그는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다시 한 번 지휘봉을 든다.
그의 음악감독 임명에 라 스칼라 극장의 이사회는 만장일치였다. 총감독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의 제안에 주세페 살라 밀라노 시장을 포함한 극장 측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현 음악감독 리카르도 샤이 역시 “지금이 적절한 결정”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선임은 단지 화려한 이력 하나가 더해진 것을 넘어, 정명훈이라는 예술가의 입체적인 삶을 다시 조명하게 한다. 그는 지휘만큼이나 ‘조리’에도 진심인 인물이다.
정명훈의 부엌 — ‘Dinner for 8’의 철학
그는 단순한 미식가가 아니다. 실제 요리책을 집필하고, 직접 요리하며, 음식에 자신의 예술관을 담아낸다. 지난 2003년 나온 요리책 ‘Dinner for 8’는 그의 대표작이다. 책에는 이탈리아와 한국 요리를 중심으로 60여 개의 레시피가 실려 있고, 각 요리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 57곡이 함께 소개된다.
책 제목의 ‘8’은 그와 아내, 세 아들,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될 가족들까지, 여덟 사람이 함께 둘러앉는 식탁을 상징한다. 그 식탁은 단순한 저녁상이 아니라, 가족과 인생, 예술이 모이는 무대다.
정명훈은 복잡한 요리보다 기본에 충실한 요리를 선호한다. 신선한 제철 재료, 간결한 조리법, 그리고 함께 나누는 식사. 그의 요리는 고급 레스토랑의 미장센이 아니라 따뜻한 집밥에 가깝다.
어린 시절 식당 주방에서 시작된 조리 인생
정명훈의 요리에 대한 애정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 시애틀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식당에서 설거지를 돕고 채소를 다듬으며 요리의 감각을 익혔다. 손님들의 주문에 빠르게 응대하면서 ‘즉흥 조리’의 감각도 키웠다.
이후 LA필하모닉 재직 시절에는 이탈리아의 명 지휘자 줄리니와 함께 다닌 파스타 식당에서 요리의 매력을 더욱 깊이 경험했다. 직접 파스타 기계를 들여와 집에서 면을 뽑았고, 파스타의 쫄깃함을 논할 정도로 깊이 빠졌다.
요리와 지휘, 해석의 예술
‘Dinner for 8’에서 정명훈은 요리와 지휘가 닮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요리사와 지휘자는 해석을 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재료는 악기와 같고, 레시피는 악보와 같습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죠”라고 말했다.
그는 요리할 때처럼 음악에서도 조화를 중시한다. 개별 악기의 음색을 살리되, 전체 앙상블이 하나로 어우러지도록 이끄는 것. 그 방식은 그의 요리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식탁에서도 균형과 조화를 중요시한다.
자연주의 셰프, 그리고 라 스칼라의 지휘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집을 마련해 채소를 기르고 닭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의 연장이자 실천이다. 정명훈은 좋은 음악이 좋은 삶에서 온다고 믿는다. 삶의 질감, 가족과의 교감, 그리고 자연에 대한 존중이 그에게는 음악보다 더 깊은 뿌리를 제공한다.
그런 그가 이제 라 스칼라로 간다. 무대는 세계 최고, 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부엌을 무대로 삼는 지휘자. 요리하듯 지휘하고, 지휘하듯 요리한 그의 인생은 음악과 식탁 위 모두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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