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ok&Chef = 이경엽 기자] 지난 8월 1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광복 80년, 국민주권으로 미래를 세우다’라는 주제로 제21대 대통령 국민임명식이 열렸다. 행정안전부는 이번 행사를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대축제”로 소개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체육·과학기술 등 각계 인사와 국민 3,500명이 함께하며, 광복둥이, 다섯 쌍둥이 부모, 탄핵 시위 당시 장갑차를 막은 부부 등 상징적 인물 80명이 ‘국민대표’로 선정돼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행사는 ▲광복 80년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1부 ‘함께 찾은 빛’, ▲대통령과 국민대표가 참여하는 2부 ‘빛의 바람’, ▲공연과 축제로 꾸며진 3부 ‘빛나는 우리’로 구성된다. 국민대표 80인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과 사회 각 분야를 상징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국민대표 80인’, 그러나 한 사람도 없는 요리·외식 분야
국민대표에는 과학기술·스포츠·예술·노동·농업·사회봉사·환경·군·재난 구조 등 폭넓은 분야의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자, 낙농가, 응급구조사, 영화감독, 체조선수, 바둑기사, 항공우주 연구원, 환경운동가, 독립운동 후손, 농민 등 각계각층이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식문화와 외식산업을 대표할 만한 인물, 특히 요리사·조리사·셰프·전통음식 계승자 등 요식업과 음식 분야에서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이는 ‘문화강국’ ‘국민주권’이라는 행사 기치와는 다소 모순되는 지점이다. 음식과 요리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한 나라의 문화 정체성과 직결된 영역임에도, 국민대표 구성에서 철저히 배제된 셈이다.
음식문화는 국민 정체성의 핵심, 왜 배제됐나
광복 80년은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형성된 현대 한국사의 축약판이다. 이 역사 속에서 음식과 외식산업은 단순한 ‘부차적 산업’이 아니었다. 전쟁 직후 구호식량과 잿더미 속에서 재건된 한식, 1960~70년대 분식 장려 정책과 식량 자급 노력, 19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식의 국제화, 최근 K-푸드 열풍까지—한국의 음식은 경제 성장과 문화 외교, 국민 건강, 농어업과 제조업 발전의 허브였다.
그러나 이번 국민대표 명단에서 음식문화 관련 인물을 찾기 어렵다. 농업인은 일부 포함됐지만, 식재료 생산자 중심이며, 이를 가공·조리·창작해 국내외에 전파한 인물은 배제됐다. ‘문화·예술’ 부문에서 영화, 음악, 체육, 미디어는 반영됐으나 요리는 제외됐다.
이는 문화예술 개념에서 음식문화를 체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정부·사회 구조를 드러낸다. 정부 부처의 관할 분산, 음식인을 ‘서비스업 종사자’로만 분류하는 경향, 전통 조리기능인 제도의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국민대표 선정 기준의 불균형
행정안전부는 국민대표 선정 이유로 “각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평범한 국민”을 들었다. 그러나 분야별 균형을 보면, 첨단산업(AI·항공우주)과 체육, 영화 등 일부 분야에 비해 음식·외식·조리 분야는 완전히 공백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AI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관련 인사만 6명, 항공우주·반도체·기술 발명까지 포함하면 10명 이상이 선정됐다. 체육 분야에는 체조·축구·하키·바둑 등 선수와 지도자가 다수 포함됐고, 문화예술 분야도 영화감독, 특수시각효과 전문가, 가수, 무용팀 등 다양하다. 농업·축산 분야 역시 낙농가, 청년농부, 친환경 농업인이 포함됐다.
그러나 음식·조리 분야는 전무하다. 이는 ‘문화강국’ 비전 속에서 음식문화를 소홀히 여기는 사회 인식을 드러내며, K-푸드 확산을 국가 과제로 삼는 농림축산식품부·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정책 방향과도 배치된다.
국제적 흐름과 달라...음식인을 포함한 국민대표 선정 필요
해외에서는 음식인이 국가 대표 행사에 초청되는 사례가 많다. 프랑스의 국가 기념식에는 미슐랭 셰프와 전통 제과장이 참석해 프랑스 미식문화를 상징한다. 일본은 올림픽·국제행사에 전통 장인과 셰프를 포함해 ‘와쇼쿠(和食)’를 국가 문화유산으로 강조한다. 미국 역시 백악관 만찬에서 국가 대표 셰프를 초청하는 것이 관례다.
이에 비해 한국은 K-팝, K-드라마, K-게임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푸드의 상징 인물을 국민대표에서 찾을 수 없다. 이는 국가 브랜드 전략 차원에서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번 국민대표 선정에서 음식·조리 분야가 제외된 것은 단순한 인원 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음식문화가 국민 정체성·문화주권의 중요한 축임에도 제도적·정책적 무관심 속에서 주변화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광복 80년을 맞아 국민주권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먹는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킨 이들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전통 한식 계승자, 세계 대회 수상 셰프, 지역 식문화를 살린 요리사, 학교·군 급식 개선에 앞장선 조리사 등은 모두 국민대표로서 상징성과 공헌도를 갖춘 인물이다.
“국민”의 정의를 다시 묻다
‘국민대표 80인’은 상징이다. 누가 그 자리에 오르느냐는 국가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보는지, 어떤 미래상을 그리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명단에서 요리사와 음식인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문화강국’의 비전을 말하면서도 음식문화를 정치·문화·과학·체육에 버금가는 국가 자산으로 보지 않는 시각을 반영한다.
광복 80년의 국민임명식은 분명 축제다. 그러나 진정한 국민주권은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골고루 담을 때 완성된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국민대표 명단에는 ‘한 사람도 없는’이 아니라 ‘빠질 수 없는’ 분야로서, 음식과 요리의 주역들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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