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자리한 기순도 명인의 장고지]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3월의 햇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질 무렵, 마당의 장독대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겨우내 매달려 있던 메주가 내려오고, 항아리에는 맑은 소금물이 채워진다. 집집마다 장을 담그던 시절에는 이 시기가 되면 마을 곳곳에서 메주를 씻고 말리는 풍경이 이어졌다. 한국의 장은 이렇게 봄의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다.
한국 전통 장 문화의 출발점은 메주다. 메주는 삶은 콩을 찧어 덩어리로 만든 뒤 자연 발효시키는 발효체로, 겨울 동안 미생물이 자리 잡으며 장의 기초가 되는 풍미를 형성한다. 이 메주를 이용해 장을 담그는 시기는 보통 음력 정월에서 이월 사이, 양력으로는 2월에서 3월 무렵이다. 예로부터 “정월에 장을 담가야 한 해 음식이 편하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장 담그기는 한 해 식생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장 담그기가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겨울이 지나면서 기온이 서서히 오르지만 아직 더위가 시작되기 전이라 발효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기온이 너무 낮으면 발효가 느리고, 반대로 기온이 높아지면 잡균이 번식하기 쉽다. 초봄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는 장 발효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다. 장을 담그는 날씨를 중요하게 여겨 “장 담그는 날에는 날씨가 맑아야 한다”는 말도 전해진다.
장 담그기의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먼저 겨울 동안 발효된 메주를 깨끗이 씻어 말린 뒤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붓는다. 이때 사용하는 소금물은 단순한 염수가 아니라 발효를 조절하는 중요한 요소다. 소금 농도가 너무 낮으면 부패가 일어나기 쉽고, 너무 높으면 발효가 억제된다. 전통적으로는 메주가 충분히 잠길 정도의 염수를 만들어 항아리에 붓고, 그 위에 숯과 고추, 대추를 띄우기도 했다. 숯은 잡냄새를 흡착하고 고추는 벌레를 막으며 대추는 길상적인 의미를 담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발효를 돕는 동시에 장을 담그는 의례적 상징으로도 기능했다.
이렇게 담근 장은 약 한두 달 동안 발효를 거친 뒤 ‘장 가르기’라는 과정을 거친다. 장 가르기는 발효된 메주를 건져 으깨고 액체와 고체를 분리하는 작업이다. 이때 위에 떠 있는 맑은 액체는 간장이 되고, 남은 고체는 된장이 된다. 같은 메주에서 출발했지만 발효 방식과 숙성 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후 된장은 항아리에서 다시 숙성되며 깊은 풍미를 얻고, 간장은 별도의 항아리에서 숙성을 이어간다.
한국의 장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음식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발효 식품이다. 국과 찌개, 나물과 조림, 김치와 장아찌까지 대부분의 한식은 장을 중심으로 맛을 형성한다. 특히 된장은 콩 단백질이 발효되며 아미노산이 풍부해지고, 간장은 발효 과정에서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낸다. 이런 발효 과정은 한국 음식이 오랫동안 채소 중심 식단을 유지하면서도 풍부한 맛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 시대 문헌에서도 장의 중요성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18세기 농서와 생활서인 《증보산림경제》에는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는 방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여성 생활 지침서인 《규합총서》(1809) 역시 장 담그는 법과 장 관리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장이 단순한 가정 음식이 아니라 생활을 유지하는 핵심 식품이었음을 보여준다.
장독대 역시 이러한 장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장을 담은 항아리는 햇빛과 바람을 받는 마당에 놓였다. 옹기로 만든 항아리는 미세한 기공을 통해 공기가 드나들며 발효를 돕는다. 햇볕은 수분을 조절하고 바람은 온도 변화를 완화한다. 그래서 장독대는 단순한 저장 공간이 아니라 발효가 이루어지는 작은 생태계였다.
오늘날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풍경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봄이 되면 여전히 전통 장을 만드는 농가와 장인들의 마당에서는 메주가 내려오고 항아리가 다시 열린다. 장은 한 번 담그면 몇 달,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지나며 숙성된다. 그 과정에서 콩의 단백질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된장과 간장은 한국 음식의 기본이 되는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다. 한국 음식의 맛을 이루는 가장 오래된 발효 식품이며, 밥상 전체의 맛을 지탱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국과 찌개, 나물과 조림, 김치와 장아찌까지 많은 한식이 장에서 시작된다. 봄에 장을 담근다는 것은 결국 한 해의 식탁을 준비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전통 장 생산지에서는 3월이 되면 장독대의 항아리가 다시 열리고, 겨울 동안 발효된 메주가 소금물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발효는 계절을 지나며 천천히 익어 간다. 한국의 장은 빠르게 만들어지는 음식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완성되는 발효 식품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의 출발점은 언제나 봄의 항아리에서 시작된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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