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이경엽 기자] “향을 먼저 맡아보십시오.”
2025년 7월 31일, 서울 종로구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열린 한식콘서트 현장. 이날 강연자로 나선 덕화명란 장종수 대표는 관객들에게 발효 명란이 담긴 항아리를 건네며 조심스레 향을 먼저 맡아보라고 권했다.
항아리 뚜껑이 열리자 공간 전체에 짙고 짠 기운의 독특한 냄새가 퍼졌고, 청중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명란이 품은 깊은 향기를 음미했다. 생선의 냄새를 넘어선, 어떤 기억의 층위처럼 묘한 분위기가 공간을 감쌌다.
장 대표는 “조선 명란은 지금 우리 기억 속에는 사실상 사라진 전통 명란젓”이라며, 이번에 선보인 명란은 직접 삭히고 발효해 가져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명란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는 우리 회사가 오랜 기간 현장에서 명란을 만들며 직접 연구해온 것으로, 문헌에 기록된 것도, 책에 정리된 것도 아닌 살아 있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수산 부문은 아직 한식과의 연결성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강연이 그만큼 더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북어는 발명품이다” – 한반도에서만 꽃핀 명태의 지혜
명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명태를 빼놓을 수 없다. 장종수 대표는 명태가 약 400년간 한반도의 ‘국민 생선’이었다고 강조했다. 명태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이 없는 생선으로, 살은 어묵, 창자는 창난젓, 알은 명란젓, 간은 간유, 아가미는 깍두기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서양에서는 최근에야 ‘하나 잡으면 끝까지 다 먹자’는 지속 가능한 소비 습관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옛날부터 이처럼 명태를 온전히 활용해왔다”며, 명태가 우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산물 활용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이자 지속 가능한 생태적 형태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명태는 전 세계 흰살 생선 어획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중요한 생선이다. 명태의 주요 서식지는 북태평양 연안으로, 대서양에서는 잡히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풍부하게 잡히는 명태를 ‘국민의 생선’으로까지 발전시켜 먹었던 민족은 한반도밖에 없다는 장 대표의 연구 결과이다.
명태 서식지 주변의 다른 해양 부족들은 명태를 ‘맛없는 바다 쓰레기’로 여기거나 비료로 사용했다. 일본 역시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기 전까지는 명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장 대표는 “왜 유독 한반도만 이 맛없는 명태를 먹었을까”라는 질문에 그 이유를 ‘북어’에서 찾았다. “한반도는 맛없는 명태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게 기후 조건하고 맞아떨어졌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1917년 함경남도 신포의 명태 덕장 사진을 보여주며, “바닷가에서 명태가 들어오면 여기서 바로 말린다”며 덕장이 2층, 3층으로 쌓인 모습을 설명했다. 이는 1691년 최창대가 쓴 시 ‘수성가’에서 ‘산과 같이 쌓여 셀 수 없는’ 명태를 묘사한 표현과 일치한다.
그는 “음식이라고 하는 게 단순히 인간의 지혜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연하고 인간이 만나서 나오는 지혜의 총체”라며, 북어가 바로 그 사례라고 강조했다. 장 대표는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에 딱 맞게 북어가 만들어졌다”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북어가 상업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은 한반도에서 기술자들을 데려가 북어를 생산하려 했지만,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고”며 “북어는 한반도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지혜가 결합해 탄생한, 어쩌면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하며 북어의 발명품적 가치를 강조했다.
400년 한반도 역사와 함께한 명태와 명란
명란젓 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진상품으로 명란젓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당대 명란의 위상을 분명히 보여준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다룬 『의궤』에도 명태가 등장하며, 명태와 명란이 서민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소비된 보편적 식재료였음을 입증한다. 반면 1700년대 일본 학자 아메노모리 호슈가 쓴 『교린수지』에는 함경도에만 명태가 많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 일본인들이 명태를 먹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실학자 서유구가 1820년경 쓴 『난호어목지』에는 명란에 대한 과학적이고 상세한 묘사가 남아 있다. “배를 갈라 알을 취하는데 색깔이 샛노랗고 소금 등에 절이면 붉은 색이 된다.”는 표현은 명란의 실제 색 변화 과정을 정확히 서술하고 있으며, 소금에 절여 먹는 백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명태가 원산에 모여든 후, 동해안으로는 배를 통해, 내륙으로는 말에 실어 전국으로 유통되었다는 경로까지도 기술되어 있다. 1800년대에 이미 명태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수산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명태가 일종의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으며, 산골 벽지까지도 널리 유통되었다. 1800년대 중후반 기록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명태가 매일같이 밥 반찬으로 쓰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제사 때 고기 대신 명태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평가에 따르면, 19세기 말 명태는 조선 최고의 생선으로 평가받았으며, 동제나 고사, 제사 등 전통 의례의 필수 품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장종수 대표는 “명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역사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명태는 단순한 생선을 넘어 조선인의 삶과 기억, 정서를 상징하는 존재였음을 강조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해남 지역에서 발견된 자료에는 명란이 북어와 함께 등장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명란 한 승(항아리)이 7전에 거래되었는데, 당시 명란의 주 생산지였던 원산에서 멀리 떨어진 해남에서까지 명란이 소비되었음의 시사한다.
백석 시인은 자신의 시 『멧새소리』에서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라며 명태를 조선 민족의 처지에 빗대어 표현했으며, 채만식의 소설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미국에 간 조선 동포들이 북어를 보며 고국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처럼 명태는 단순한 국민 생선을 넘어, 민족의 감성과 역사에 깊이 각인된 상징적 존재였다.
일제강점기, 명란의 변모와 일본식 멘타이코의 탄생
조선시대가 끝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명란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동시에 주목받기 시작하며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명태는 더욱 ‘핫한 생선’이 되었지만, 명태는 주로 조선 민족이 선호했고, 명란은 일본인이 더 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한국 수산지』에는 명란을 질그릇에 담아 소금과 고춧가루를 넣는 방법이 기술돼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명란과는 형태와 제조법이 다소 다르다.
같은 해 열린 조선식량품평회에서는 고종의 마지막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출품한 명란이 3등상을 수상했다. 안순환은 근대적 한식당 ‘명월관’을 운영한 인물로, 한식을 자본주의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 셰프로 평가받는다. 장 대표는 안순환이 만든 명란이 오늘 시향했던 조선 명란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명란의 시초가 된 카라시 멘타이코는 카와라 도시오라는 인물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으로, 일제강점기 초량동에서 살며 조선의 명란 깍두기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 후 후쿠오카 하카다에 정착한 그는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조선 명란젓의 맛을 재현하고자 했고, 그것이 오늘날 일본식 명란의 출발점이 되었다.
장 대표는 “한일 경계지대라고 할 수 있는 부산, 한국과 일본이 섞여 있는 그 경계지대가 사실 만든 새로운 하나의 발명품”이라며, 카라시 멘타이코는 문화 경계와 기억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잊혀진 명태의 기억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일본에서는 명란이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고 더욱 발전했지만, 한국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며 명란의 역사가 단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고, 가난한 상황에서 짠맛을 미식으로 이끌어낼 여유는 없었다.
더욱이 1986년 이후 명태 어장이 붕괴되어, 2008년에는 사실상 ‘제로’ 상태에 이르렀다. 원래 명태 어장의 중심은 북한 원산 이북 신포시 일대였다. 장종수 대표는 명태 어장 붕괴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분단과 전쟁의 여파로 벌어진 남북 간 어장을 둘러싼 경쟁”을 꼽았다.
그는 “우리가 명태와 명란을 잃어버린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분단과 전쟁의 여파, 우리가 그것을 잘 극복해내지 못했던 부분들이 크다”고 개인적인 소신을 밝혔다.
명태 어장의 상실은 단순히 식량 자원의 고갈을 넘어, 우리 민족의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 장 대표는 “왜 우리한테는 명태에 대한 감각이 없을까?”라고 질문하며, 전 세계에서 유독 우리만 명태를 먹었고, 명태는 우리에게 무속, 부적, 상징물로까지 들어왔으며, 값싸게 매일 아침 밥반찬으로 먹던 소중한 음식이었음에도 그 깊은 관계와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를 ‘한국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전쟁이 사람을 바꿔 놓았고, 전쟁 이전과 이후의 인간은 달라지며, 그에 따라 자연과 맺은 관계, 명태와 맺은 관계도 변했다고 분석했다. 장 대표는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전쟁 이후 한반도의 지배 이념을 ‘생존주의’로 설명한다. 이는 생존을 위해 명분과 예의를 버리고, 오직 살아남는 것과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계관이다.
신샛별 동국대 연구자의 박완서 소설 연구 논문에서는 한국 전쟁 이후를 ‘동물적 미각과 포식의 시대’로 규정한다. 이는 역사, 전통, 관계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오직 배를 채우는 ‘탐식’만이 중요해진 시대를 뜻한다. 장 대표는 이 또한 전쟁의 트라우마라고 보았다.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다룬 ‘절망’ 개념을 통해 장 대표는 한국 전쟁 이후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절망에 대처하는 전략은 ‘기절’이며, 새로운 흐름이 펼쳐지면 그것을 따라 흘러가며 쉽게 다른 사람이 되고, 과거의 연결과 기억을 정당화하며 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라 한다.
그는 명란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이 기억을 상실하게 된 이유 자체가 전쟁의 트라우마로 설명될 수 있다고 역설하며, “우리는 왜 명태를 상실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란의 메시지: 화합과 미래를 향한 길
장종수 대표는 마지막으로 1972년 『경향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통해 명란이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기사는 한국 전쟁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 예비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을 때의 식사 풍경을 담고 있다. 당시 식탁에 오른 ‘삼색 명란찜’은 가장 먼저 등장한 음식이었다. 명란 두 알이 붙어 있는 모양은 현장에서 ‘한 배’ 또는 한자로 ‘동포(同胞)’로 표현되었다.
장 대표는 이름 없는 요리사가 명란을 통해 “남과 북은 형제고 하나인데, 우리가 빨리 화합하고 하나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해석했다. 그는 이 사례가 요리가 얼마나 위대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며, 명태와 명란이 우리 역사적 과정을 모두 담고 있기에 가능한 스토리라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우리의 미각이 불완전하며, 오로지 관능에만 의존해 맛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아동 노동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미각은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음식을 더 이상 맛있게 느끼지 못하듯, 맛에는 전통, 역사, 사회, 환경, 인문학 등 다양한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네오 미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명란이야말로 우리 모든 기록이 집약되고 저장된 ‘아카이브’와 같다고 말했다. 명란을 먹을 때 그 역사와 기억을 함께 떠올린다면, 맛의 위계 구조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장 대표는 키르케고르의 ‘후회와 희망’ 개념을 인용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인생은 희망을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되,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결정적인 요소로 보았다. 전쟁이 야기한 생존주의, 동물적 미각, 탐식과 포식의 카테고리를 넘어서야 하며, 한국 전쟁을 극복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소수자, 이방인, 난민’의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 전쟁 이후 우리는 모두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라가 없었고 고향이 없어졌다는 감정 속에서, 이방인·난민·소수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며, 전통 음식은 그런 고민을 담고 있는 중요한 아카이브라고 강조했다. 장 대표는 명란과 같은 음식이 이러한 사회적 기여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청중들에게 명란을 생각할 때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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