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Chef = 오요리 기자] 전라남도 나주 소재 김치 생산업체 ㈜골든힐의 선적장. 1,830박스의 김치가 지게차에 실려 40피트 컨테이너 내부를 채운다.
총 9천만 원 규모의 이 물량은 목포항을 거쳐 미국 로스앤젤레스항으로 향한다. 이는 단순한 수출 실적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김치가 미국 시장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출은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 변화라는 순풍을 활용한 전략적 행보다. 미국 보건복지부(HHS)와 농무부(USDA)가 공동 발표할 ‘미국인을 위한 식단 가이드라인(DGA) 2025-2030’ 과학자문위원회 보고서에 김치가 공식적으로 명시된 것이 배경이다. 이 문장 하나가 대한민국 김치 산업 전체에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해당 지침의 과학 보고서는 장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발효식품 사례로 요거트, 케피어 등과 함께 ‘김치(Kimchi)’를 명확히 언급했다. 이는 김치가 한인 사회의 음식을 넘어, 미국 공중 보건 체계가 건강 기능성을 공식 인정한 식품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전라남도의 이번 선적은 이 정책적 모멘텀을 활용해 미국 주류 시장과 공공급식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목표를 보여준다.
DGA의 무게, 단순 언급 아닌 ‘게임 체인저’
‘미국인을 위한 식단 가이드라인(DGA)’은 5년마다 개정되는 미국 국가 식생활 정책의 근간이다. 이는 단순한 건강 권고를 넘어, 연방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모든 공공 급식 및 영양 정책의 수립과 집행 기준이 된다.
구체적으로 매일 3천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학교 급식 프로그램(NSLP)’, 군인 식단을 책임지는 ‘군 급식’, 저소득층을 위한 ‘보충 영양 지원 프로그램(SNAP)’ 등 수십억 달러 규모 공공 프로그램의 식단이 모두 DGA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DGA에 특정 식품이 긍정적으로 언급된 것은, 해당 식품이 미국 내 수억 명의 식단에 편입될 정책적 정당성과 제도적 통로를 동시에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문화적 트렌드가 소비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면, DGA 등재는 공공기관의 ‘의무’ 구매 목록에 오를 수 있는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장내 미생물 군집(Gut Microbiom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발효식품의 기여도를 과학적 근거와 함께 제시한 점이다. 그 구체적 예시로 ‘김치’가 명시되면서, 김치의 건강 기능성에 대한 연구 결과가 미국 최고 보건 당국의 공인을 받게 됐다. 과거 K-푸드 트렌드가 문화적 선호도에 기반했다면, DGA 등재는 김치의 위상을 ‘문화 상품’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건강 기능성 식품’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 계기다.
이러한 정책적 공인은 미국 내 소비자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건강에 관심이 높은 미국 소비자에게 DGA는 신뢰도 높은 식품 선택 기준이다. 의사나 영양사가 식단을 추천할 때도 DGA를 우선 참고한다. 이제 김치는 아시아계 마트를 넘어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과 같은 주류 유기농 마켓의 건강식품 코너 전면에 나설 명분을 얻었다.
데이터로 증명된 전남의 선제적 대응
전라남도는 이 기회를 선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20일 나주 ㈜골든힐에서 열린 ‘전남 김치 미국 수출 선적식’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속하고 구체적인 대응이다. 선적식에는 신현곤 전남도 국제협력관, 김진태 전남김치사업협동조합 이사장 등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했다.
선적 물량 구성에서 시장 변화가 감지된다. 전통 포기김치뿐만 아니라 알타리김치, 파김치 등 총 5종, 1,830박스로 다변화됐다. 이는 미국 내 김치 소비층이 다양한 풍미와 식감을 찾는 수준으로 성숙했음을 시사한다. 한인 시장을 넘어 K-푸드에 관심이 깊은 현지인들이 적극적인 소비층으로 부상했다는 방증이다.
전남 김치의 대미 수출 실적은 DGA 호재 이전부터 견고한 성장세를 보여왔다. 전라남도에 따르면, 대미 수출액은 2023년 155만 달러, 2024년 157만 달러를 거쳐, 2025년 184만 달러로 급증했다. 2025년 실적은 전년 대비 17.2% 증가한 수치로, 시장 기반이 탄탄하게 다져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전라남도의 근본적인 경쟁력이 있다. 전국 최고 품질의 해남 배추, 신안 천일염, 청정 해역의 젓갈 등 핵심 원료 주산지라는 강점이다. 이러한 ‘떼루아(Terroir)’는 “전남 김치는 맛이 깊고 시원하다”는 현지 바이어 평가로 이어졌다. 여기에 한류 확산과 미국 내 발효식품, 프로바이오틱스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 시너지를 냈다.
100조 원 공공급식 시장, 새로운 블루오션
이번 전남 김치 수출은 소매 시장 확대를 넘어 ‘공공급식 시장’을 정조준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DGA는 학교, 군대, 병원 등 제도권 식단의 기준으로, 김치가 가이드라인에 포함된 것은 이 거대 시장 진입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미국 학교 급식 시장 규모만 연간 약 150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한다. 미국 전역 학교 급식에 김치가 주 1회 채택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안정적 수요처를 확보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김치를 접한 세대가 성인이 된 후에도 김치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져 미국 식문화에 깊이 뿌리내리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물론 공공급식 시장 진입은 간단한 과제가 아니다. 일반 소비 시장보다 훨씬 엄격하고 복잡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 나트륨 함량 등 영양학적 기준 충족이다. 미국 학교 급식의 엄격한 나트륨 상한선을 고려한 ‘학교 급식용 저염 김치’ 개발이 시급하다.
둘째, 알레르기 유발 물질 관리다. 새우젓, 멸치젓 등은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 공공급식에서는 단 한 건의 사고도 치명적이므로, 젓갈을 사용하지 않은 ‘비건 김치’를 표준 모델로 제시하고 성분을 명확히 표시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셋째, 가격 경쟁력과 안정적 공급망 확보다. 대량 조달 시장에서는 가격이 중요한 잣대다. 한국 생산 수출 방식이 현지 생산 업체와의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냉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연중 동일한 품질의 제품을 공급할 대량 생산 및 물류 시스템 구축도 선결 과제다.
전라남도는 이번 수출 물량을 미국 내 ‘전남 해외 상설판매장’을 통해 유통하며 현지 소매 시장 반응을 분석할 계획이다. 소매 시장 성공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공급식 시장용 맞춤형 제품을 개발하는 투트랙 전략이 요구된다.
지속 성장의 열쇠, 품질 표준화와 현지화
DGA라는 기회를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연결하려면 ‘품질 표준화’와 ‘현지화’가 필수적이다. 김진태 전남김치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이 “원료 관리와 제품 표준화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받는 전남 김치를 만들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품질 표준화는 맛의 일관성을 넘어선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기준을 준수하는 HACCP 인증은 기본이며, 원재료부터 유통까지 전 과정을 추적하는 ‘이력 관리 시스템’으로 바이어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특히 유통 과정에서 품질 변화를 최소화하는 콜드체인 시스템 완비가 핵심이다.
동시에 영리한 현지화 전략이 중요하다. 신현곤 전남도 국제협력관 역시 “현지 소비 트렌드에 맞춘 제품 다변화와 마케팅”을 강조했다. 현지화는 단순히 맵기를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첫째, 제품 형태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입문자용 ‘마일드 백김치’, 샐러드용 ‘김치 슬로(Kimchi Slaw)’, 타코용 ‘다진 김치’, 조미료 형태의 ‘김치 파우더’나 ‘김치 핫소스’ 등 현지 식생활에 스며들 수 있는 제품 개발이 시급하다.
둘째, 소비 맥락의 재정의가 요구된다. 김치를 ‘밥반찬(Side dish for rice)’으로만 한정하면 주류 시장 편입에 한계가 있다. 대신 ‘모든 음식에 건강과 풍미를 더하는 프로바이오틱 토핑/소스(Probiotic Topping/Sauce)’로 마케팅 축을 전환해야 한다. ‘아보카도 토스트에 김치 토핑’과 같은 구체적인 활용법 제시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미국 연방 식단 가이드라인의 김치 언급은 한국 식품 산업의 역사적 변곡점이다. 전라남도의 발 빠른 수출은 이 기회를 현실적 성과로 연결하려는 전략의 첫걸음이다. 단기적으로는 수출액 증대를, 장기적으로는 미국 공공급식 시장 진입과 식문화 주류 편입을 목표로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명확하다. DGA의 공인을 기반으로 김치의 본질은 지키되, 나트륨과 알레르겐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적 접근, 그리고 현지 식문화에 녹아드는 현지화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이번에 태평양을 건너는 1,830박스의 김치가 K-푸드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주춧돌이 될 수 있을지 산업 전체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Cook&Chef / 오요리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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