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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班家)의 음식 전문점
분당 '고가'
분당 율동자연공원 가는 길목에 고즈넉한 풍경에 둘러싸인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출입문 앞에 현대식 건물만 보고 지나친다면 고택(古宅)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건물을 끼고 들어서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듯 흙냄새 물씬한 한옥과 마주하게 된다.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은 그곳에 처음 발을 들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감상일 것이다.
▲고가(古家)로 오르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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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古家)의 탄생
반가(班家)음식 전문점 ‘고가’가 탄생한 배경은 참 흥미롭다. 물론 음식을 만드는 솜씨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인 건 당연한 이치다.
윤정숙 대표는 우리나라 궁중요리의 대가 황혜성 선생으로부터 전수를 받은 궁중요리 전문가다. 하지만 그것으로 식당을 차릴 생각은 구체적으로 해본 적 없다는 게 윤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분당에 위치한 지금의 한옥을 전원주택용으로 사용할 요량으로 매입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우리나라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게 바로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반환문제였다.
당시 프랑스 대표단 식사대접을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우리 측 인사가 전원주택용으로 구입해둔 고택을 보고 그곳에서 음식을 제공해줄 수 없느냐고 윤 대표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전통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말에 윤 대표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러겠노라 했고, 부랴부랴 집을 꾸미고 해서 반가음식을 만들어 제공했다. 그게 행사 이틀 전 일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분주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물론 집 주변을 정리하는 등의 비용은 모두 사비로 치렀다. 재밌는 후일담이라면 당시 식사비를 원가를 밑도는 돈만 받았다고 하는데, 윤 대표는 “돈보다 역사적인 일에 의미를 살리고,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었다”며 “규장각에 고문서가 되돌아 왔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표단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고가에서의 식사라고 했을 정도라니 윤 대표의 솜씨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어쨌거나 이를 계기로 윤 대표는 자신이 직접 식당을 열어 반가음식을 사람들과 나누기로 결심하게 된다. ‘고가’를 이름으로 걸고, ‘반가음식’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순간이다.
궁중요리에서 반가음식으로
프랑스 대표단이 떠나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윤 대표의 궁중요리를 맛보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재미도 있었고, 전수받은 궁중요리를 많은 이들에게 소개한다는 보람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다 서해안 기름유출사고가 터졌다. 문제는 윤 대표가 궁중요리 식재료 대부분을 서해안에서 조달했다는 것에 있었다. 매일 새벽 서산을 통해 싱싱한 자연산 해산물을 공급받아 요리를 했는데, 그만 자연산을 포기해야만 했다. 윤 대표 표현을 빌자면 ‘궁중요리 자연산 재료의 보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 궁중요리 전문가 윤정숙 대표 |
결국 윤 대표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품목을 변경하자는 생각에 과감히 궁중요리에서 어릴 때부터 경험한 상차림을 주메뉴로 하기로 한다. 궁중요리보다 좀 더 대중적인 반가음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고 자연산 재료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서해안 기름유출사고 이후 지금은 그곳 대신 통영, 완도, 진도 등에서 자란 자연산 식재료만을 사용해 전통적으로 먹었던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제철에 난 재료가 아닌 것은 쓰지 않는다. 이는 수입산을 사용해 같은 음식을 내는 여타 음식점과 차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수입산이나 불투명한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제철 반가음식을 먹으러 온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신뢰를 무너뜨리는 거라고 윤 대표는 강조한다. 과연 장인의 고집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기품 있는 맛의 색
흔히 남도음식이라면 갖은 양념을 넣어 맛은 있지만 자극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윤 대표의 설명은 다르다.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남도음식을 전통음식이라고 판단하는 건 좀 무리가 있어요. 특히, 전통적인 남도 반가음식은 되도록 양념을 적게 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있어요. 담백함이 생명이죠.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통이 사라지고, 상업화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오해들을 하는 것 같아요.”
윤 대표 설명을 빌자면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식의 품위나 소박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극이 자리 잡게 된 듯 보인다. 그것은 맥이 희미해진 반가음식뿐 아니라 우리가 경제성장을 대가로 내어준 가치인지도 모른다.
고가는 그렇듯 사라져가던 반가음식을 되살려놓았다. 고가가 내는 음식들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맛과 차이가 있다. 그것은 된장과 간장이 익어가는 200여 개의 항아리에서 먼저 느껴진다. 20년이 되어가는 간장과 된장도 있다고 하니 장에 대한 고집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장이라야 고가 음식의 맛을 내는 양념의 자격을 얻는다.
▲ 고가의 모든 음식은 자연재료로만 만들어진다 |
고가에서는 당연히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최소한의 양념을 사용하고, 오래된 된장과 간장을 위주로 간을 하는데, 윤 대표는 바로 그것이 고가의 맛의 비결이라고 전한다. 또한 설탕 대신 과일로 단맛을 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에 오른 남도 반가음식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간직하고 있다.
화려한 음식들이 넘쳐난다. 좋은 식기에 고운 색깔을 입은 달콤한 유혹이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시대다. 윤 대표는 말한다. 화려한 색과 단맛으로 음식을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자극은 더 강한 자극을 찾도록 하기 마련이다.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고, 깊은 맛을 발견하고 싶다면 고가를 방문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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