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는 시간이 주는 맛” 박성배 셰프, 한식의 정체성과 미래를 말하다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08-25 09:00:02
박성배 셰프 사진 = 이경엽 기자
지난 8월 21일, 서울 종로구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열린 한식콘서트 무대에 선 박성배 셰프는 평범한 요리 강연을 하지 않았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온지음’의 헤드 셰프이자 수석 연구원인 그는, 한식의 과거를 탐구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의 방향을 묻는 연구자이자 장인으로서 청중 앞에 섰다.
그는 신라호텔의 최고 한식당 ‘서라벌’에서 자부심을 키웠지만, 호텔의 한식당이 문을 닫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스승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외식 문화를 배우고, 미국에서는 안정적인 스시 셰프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국 전통의 깊이를 탐구하자는 또 한 번의 제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온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통해 얻은 지혜를 나누고자 했다. “온지음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를 짓는 공간”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그는, 전통 조리서에서 배운 지혜와 발효의 힘, 그리고 김치와 장이 지닌 세계적 가능성을 풀어놓았다.
장인의 길: 배움의 태도와 맛의 철학
박 셰프는 먼저 후배 조리인들에게 배움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조언은 단순히 기술을 연마하는 것을 넘어,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한 권의 고조리서라도 끝까지 읽어보라”고 그는 조언했다. 그는 단순히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책 속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봐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고조리서에 나오는 음식을 일단 다 만들어보는 겁니다. 책을 한 번 읽고 나만의 방식으로 레시피를 노트에 정리한 뒤, 그 요리를 전부 실현해보는 거죠. 그래야 ‘내 것’이 되더라고요.”
그는 이 과정을 무술의 ‘도장 깨기’에 비유하며, 조리서 한 권을 온전히 정복할 때 비로소 자신만의 방식이 생기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는 방식을 소개했다.
“음식디미방 같은 책을 페이지별로 할당량을 정해 각자 공부해옵니다. 예를 들어 감자 요리가 나오면, 과거 다른 고조리서에서 감자가 어떻게 쓰였는지까지 모두 조사해서 서로 이야기 나누는 거죠. 각자 느낀 점을 공유하다 보면, 같은 내용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서로의 시각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요리를 처음 배우던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었다. 생선을 다루고 싶었지만 설거지만 도맡아 하던 시절, 그는 설거지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생선실로 달려가 질문을 퍼부었다. 마침내 생선 한 마리를 다룰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배움의 태도는 단순한 요리 기술을 넘어, 연구자로서의 자기 관리와 인성에도 이어졌다. 그는 “저는 직원을 뽑을 때 담배 피우는 사람은 뽑지 않습니다. 혀는 예민해야 하고, 한국 요리의 발전을 위해 연구한다면 자기 몸부터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단언했다.
스승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숯돌과 칼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좋은 칼을 가지려면 먼저 칼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칼을 날카롭게 갈기 위해서는 숯돌이 필요하고, 저는 결국 숯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숯돌은 칼의 스승이에요. 휘어진 스승 밑에서 배운 칼은 똑같이 휘어지고, 그걸 나중에 고치기는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반듯하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내 인생의 칼날이 바르게 서는 것처럼, 삶도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강연의 핵심 화두는 한 강연자의 질문에서 비롯된 ‘21세기 한식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한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정신을 채우는 문화”라고 정의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으로 ‘격조(格調)’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 철학이 응축된 메뉴가 바로 ‘백화반(白花飯)’이다. 도라지, 더덕, 무나물 등 하얀색 재료만으로 구성되어 겉은 지극히 소박해 보이지만, 입안에서는 각기 다른 식감과 풍미가 섬세하게 어우러져 내면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내면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조연 같지만, 먹어보면 결국 가장 맛있는 음식이죠.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음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맛의 철학으로 ‘대미필담(大味必淡)’을 소개했다. “맛있는 맛은 반드시 담백하다는 뜻입니다. 첫맛의 화려함은 금세 질리지만, 담백한 맛은 먹어도 질리지 않죠. 음식도,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친절하게 다가오는 경우보다, 경계 속에서도 담백하게 관계를 시작해 진심이 쌓이면 훨씬 오래갑니다. 음식도 그런 담백함이 중요합니다.”
창조의 실험실: 발효, 시간, 그리고 지속 가능성
박 셰프의 주방은 창조적 실험실이자 발효 연구소였다. 그는 강연에서 “발효는 결국 시간이 주는 맛”이라는 확신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구장(大口醬)이다. 그는 “고려 시대부터 된장·간장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고춧가루가 들어오면서 고추장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떤 새로운 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대구장을 통해 새로운 소스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험은 쉽지 않았다. 겨울철 남는 대구 뼈와 머리를 푹 고아 만든 진한 육수에 메주 가루를 섞어 장을 담갔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어느 순간 우리 김치가 이상하게 익으면 ‘미쳤다’고 하잖아요. 딱 그런 맛이 났어요. 감칠맛은 하나도 없고 맛이 너무 없었죠.” 그는 원인이 염도 부족에 있음을 깨닫고 간을 더한 뒤 잊고 지냈다. “6개월 뒤에 열어봤는데, 정말 너무 맛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실패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발효가 결국 시간의 힘이라는 걸 다시 한번 배운 거죠.”
이러한 창조적 시도는 다른 영역에서도 이어진다. 하나의 레시피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그의 특기다. 그는 김부각을 만들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김부각은 찹쌀풀을 발라 만들지만, 저희는 요리하고 남은 재료를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어란을 만들고 남은 가루를 찹쌀풀에 섞으니 ‘어란 부각’이, 게살을 쓰고 남은 것을 넣으니 ‘게살 부각’이 탄생했죠. 이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는 또한 율무 전분을 직접 만들며 재료의 근본을 탐구한 경험도 소개했다. “율무를 활용한 옛 음식이 많은데, 정작 율무 전분은 파는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직접 율무를 갈아 전분을 만들어봤습니다. 그러자 시판 전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유의 향과 맛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재료를 깊이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합니다.”
약과 하나에도 그의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약과의 섬세하고 바삭한 식감을 위해 직접 빚은 45도짜리 고도수 증류주를 사용한다. “알코올 도수가 높을수록 기름에서 튀길 때 수분이 더 빨리 증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밀가루의 글루텐 형성이 억제되어 페이스트리처럼 아주 섬세하고 가벼운 결이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힘든 과정을 고수하는 것은 맛의 미세한 차이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한 청중은 기후 변화가 식재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문했다. 박 셰프는 이 문제에 깊이 공감하며 자신의 고민과 대처 방식을 공유했다. “기후 변화로 식재료 수급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걸 현장에서 너무 잘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라질지 모를 좋은 재료들을 건조하거나 장(醬)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귀해진 건전복(말린 전복)을 직접 대량으로 만들어 두는 것처럼요.” 그는 이를 통해 “시간이 주는 맛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동물복지 인증 달걀을 사용하고, 토종 쌀을 재배하는 젊은 농부들을 돕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치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외국에서 2주만 있어도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김치는 건강에 좋은 마약 같은 존재예요. 전 세계인들이 김치 없이는 못 살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김치를 단순한 발효 채소가 아니라 한식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정의했다. “김치는 늘 조연 같지만, 결국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이 김치를 세계에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그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미래를 향한 제언: 통합적 시각과 다음 세대
그가 몸담은 곳이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연구소로 불리는 이유도 이 철학과 맞닿아 있다. 그는 “겉의 화려함만 좇아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뿌리가 단단해야 날개를 펼 수 있습니다”라며, 음식뿐 아니라 한복·한옥 등 전통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가 한식의 깊이를 더한다고 말했다.
한 예로 그는 도미찜을 만들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서양 요리처럼 생선 살과 채소를 각각 조리해 합쳤을 때는 맛이 서로 겉돌았지만, 전통 방식대로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모든 재료와 함께 쪘을 때 비로소 깊고 조화로운 맛이 우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재료들이 서로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한식은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품어져 나오는 맛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각 분야의 고유한 방식을 존중하고 이해할 때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강연 말미에는 젊은 셰프들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이 이어졌다. 그는 “핸드폰을 너무 많이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검색하려다 다른 걸 보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마세요. 나만의 공부 리듬을 만들고, 몸이 건강해야 정신이 맑아집니다. 결국 요리는 체력 싸움이기도 합니다.” 또한 “외국 셰프들과 교류할 기회가 계속 생깁니다. 영어 공부는 지금이라도 꼭 하세요.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박성배 셰프의 강연은 조리서에서 시작된 배움의 태도, 발효와 장을 통한 창조, 김치의 세계화, 그리고 한식의 철학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메시지로 채워졌다. 그는 “한식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짓는 문화적 행위”라고 정의하며, 담백함·발효·지속 가능성·사람을 키우는 태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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