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史식사합시다] 탕평채, 흩어진 색을 한 그릇에 섞다

정수연 기자

cnc02@hnf.or.kr | 2026-06-08 18:42:16

개인화의 시대에 다시 읽는 조선의 화합 음식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Cook&Chef = 정수연 기자] 오늘의 식탁은 점점 세밀해지고 있다. 취향은 세분화되고, 생활 방식은 더 개인화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과 감각 안에서 음식을 고른다. 어느덧 혼자 먹는 한 끼도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고, 음식은 개인의 취향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런 시대에 탕평채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선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재료가 어떻게 한 그릇 안에서 어울릴 수 있을까. 색과 맛이 다른 것들은 섞이는 순간 무엇을 만들어낼까. 탕평채는 이 질문에 음식으로 답해온 오래된 음식이다. 그 이름과 색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정치 언어와 한국 음식의 균형 감각, 그리고 오늘의 식탁에 필요한 화합의 의미까지 함께 보게 된다.


서로 다른 색이 한 그릇에 놓일 때

탕평채는 청포묵에 고기볶음, 미나리, 김, 숙주, 달걀지단 등을 더해 무쳐내는 음식이다. 매끈한 청포묵의 흰빛 위로 고기의 붉은색, 미나리의 푸른색, 김의 검은색, 달걀지단의 노란빛이 놓인다. 재료마다 색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탕평채는 그 차이를 지우는 대신, 각각의 재료가 가진 결을 살린 채 한 그릇 안에서 어울리게 한다.

청포묵은 맑고 담백한 바탕이 되고, 고기볶음은 감칠맛을 더한다. 미나리는 향과 푸른 기운을 보태고, 김은 바다의 향을 얹는다. 숙주는 아삭한 질감을 만들고, 달걀지단은 색의 균형을 잡는다. 각자의 색과 맛을 지닌 재료들은 한데 무쳐질 때 탕평채라는 이름에 도달한다.

탕평채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서로 다른 재료가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한 그릇의 균형은 더 또렷해진다.


출처 : AI 생성이미지

이름에 담긴 조선의 정치 언

탕평채라는 이름은 조선 영조의 탕평책과 함께 전해진다. ‘탕평’은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편무당 왕도평평”에서 비롯된 말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공평한 정치를 뜻한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었던 시대를 지나며 당쟁의 폐해를 절감했고, 당파보다 인물을 보고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탕평책을 내세웠다.

그 말이 음식의 이름으로 옮겨졌을 때, 탕평채는 묵무침을 넘어 한 시대가 바라던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여러 재료가 고루 섞인 청포묵 무침에 ‘탕평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는, 한 시대의 고민이 음식 이름 안으로 들어온 사례처럼 읽힌다.

전해지는 해석에 따르면 탕평채의 재료는 각각의 당파를 상징하는 색으로도 읽힌다.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 고기의 붉은색은 남인,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설명이다. 여러 붕당을 상징하는 색이 한 그릇 안에 섞이는 장면은, 영조가 바랐던 정치적 화합의 이미지와 맞물린다.

탕평채의 유래는 여러 기록 속에서 복합적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 기록을 살펴보면 이 음식은 정치적 상징과 계절 음식의 성격을 함께 지닌다. 『경도잡지』와 『동국세시기』에는 녹두묵에 돼지고기, 미나리, 김 등을 섞고 초장으로 무쳐 봄밤에 먹기 좋은 음식으로 소개된다. 『명물기략』은 여러 채소를 섞어 만든 음식이 사색당파의 치우침 없는 탕평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적었다. 이런 기록들은 탕평채가 궁중의 정치 언어, 봄철 식탁, 여러 재료를 섞어 먹는 조선의 음식문화가 겹치며 의미를 얻은 음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방색으로 차려낸 화합의 감각

탕평채의 색은 음식의 인상을 결정한다. 흰 청포묵, 붉은 고기, 푸른 미나리, 검은 김, 노란 지단이 함께 놓이면 한 그릇 안에 다섯 가지 색의 질서가 생긴다. 이는 한식이 오랫동안 중시해온 오방색의 미감과도 이어진다.

오방색은 황, 청, 백, 적, 흑의 다섯 색을 말한다. 이 색들은 중앙과 동서남북의 방위, 서로 다른 기운의 균형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한식에는 이 색을 통해 보기 좋은 상차림을 넘어 균형과 조화를 표현한 음식이 많다. 비빔밥이 그러하고, 탕평채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읽을 수 있다.

탕평채에서 색은 장식에 머물지 않는다. 청포묵의 흰빛이 바탕을 잡고, 고기와 미나리, 김과 지단이 각자의 색을 더한다. 각각의 재료는 색만 다른 것이 아니라 맛과 질감도 다르다. 부드러운 묵, 향긋한 미나리, 고소한 김, 감칠맛을 지닌 고기, 얇게 부친 지단이 한입 안에서 만난다. 이 조합은 한국 음식이 어울림을 이해해온 방식을 보여준다.

탕평채는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된 음식보다 여러 색이 함께 놓인 음식에 가깝다. 먹기 전에는 색이 나뉘어 보이고, 먹을 때는 그 색들이 한데 섞인다. 눈으로는 차이를 보고, 입안에서는 균형을 경험한다. 탕평채가 지금까지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인화의 시대에 다시 보는 탕평채

지금의 사회는 취향과 의견, 세대와 생활 방식이 촘촘하게 나뉘어 있다. 각자의 세계가 선명해진 만큼, 함께 놓이는 일은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음식에서도 이런 흐름은 뚜렷하다. 한 상을 함께 나누기보다 각자의 메뉴를 고르고, 같은 자리에서도 서로 다른 취향을 존중하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졌다.

그 변화 속에서 개인의 취향은 더 분명하게 존중받는다. 각자의 색이 선명해질수록, 그 색들이 함께 놓일 수 있는 식탁도 더 중요해진다. 탕평채가 오늘 다시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음식은 화합을 거창한 구호로 말하지 않는다. 흰 묵과 붉은 고기, 푸른 미나리와 검은 김을 한 그릇에 담고, 먹기 전 고루 섞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탕평채를 먹는 일은 조선의 정치사를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고, 한국 음식이 어울림을 이해해온 방식을 맛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음식에는 영조가 당쟁의 시대에 붙잡으려 했던 공평의 언어가 있고, 오방색으로 균형을 읽어온 한식의 미감이 있으며, 봄밤에 입맛을 돋우던 계절 음식의 산뜻함이 있다.

개인의 취향이 선명해질수록, 서로 다른 색이 함께 놓일 수 있는 자리는 더 소중해진다. 탕평채는 그 가능성을 음식으로 보여준다. 오래전 조선의 식탁에서 시작된 이 작은 묵무침은, 개인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 화합의 감각을 묻고 있다.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