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Column / 아! 영산강… 영산강이 흐른다 : 낮은 강, 순박한 농민들, 역사의 흐름
조용수
cooknchefnews@naver.com | 2018-05-12 07:15:28
이 땅이 처음 만들어진 때부터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샛강이 젖줄처럼 너른 들판에 물을 공급하면서 큰 물줄기로 합쳐져 바다로 가는 강…. 봄을 맞은 들판은 온갖 풀꽃들로 풋풋한 아름다움을 가득 담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멀리서 보면 너른 들판은 더욱 시원스럽다. 푸른 들판, 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은 사람의 마음을 그지없이 툭 트이게 해준다. 강어귀 솔밭에서 날아오른 왜가리들은 날개를 펴고 비상하였다가 강가를 걸으며 배를 채우고, 그러다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새끼들을 먹이러 간다.
writer _김준혁 (소설가)
Culture Column
낮은 강, 순박한 농민들, 역사의 흐름
아! 영산강… 영산강이 흐른다.
힘든 작업 중에도 들판은 농부의 손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해 수확 가운데 많은 것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 때문에 논에서는 허리 펼 날 없는 노동이 이어진다. 뿌리째 뽑힌 잡초는 그대로 사람이나 달구지가 다니는 길바닥으로 내던져져 얼마간 더 연명하다가 말라 죽게 된다. 농부의 손길은 그 끈질긴 생명력의 잡초보다 더욱 강하다.
평야지대는 뜨거운 한여름의 햇볕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에 예전에 선조들은 군데군데 정자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나무들이 자라면 들일을 하다가 새참이나 점심을 먹는 장소가 된다. 남정네가 김치에 막걸리를 먹는 동안 아낙은 한쪽으로 돌아앉아 젖먹이에게 젖을 물린다. 시원한 그늘 아래 잠들었던 아이는 엄마의 젖을 허기진 듯 정신없이 빨다가 이내 또다시 잠에 빠져드는 곳, 그리고 새벽부터 들판을 어루만진 농부가 아침 겸해서 점심을 먹고 달디 단 낮잠에 한 숨 떨어지는 곳, 바로 정자나무 그늘이다.
이러한 평야지대에서는 도시의 번잡함 대신 자잘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시골의 일은 논일뿐만 아니라 밭일도 손이 많이 간다. 뿐인가. 짚으로 엮는 재송쿠리, 대나무로 엮는 바구니, 등짐을 지는 지게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면서 그렇게 농사일에 힘쓰는 날이 계속 되었고, 그 동안 왜가리 역시 강 속의 물고기를 먹고 둥지로 돌아가 새끼를 먹여 키우게 될 것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은 상류까지 올라온다. 큰 비라도 오는 날이면 상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과 하류에서 올라오는 바닷물이 만나는 영산포 아망바우(仰巖) 부근은 말 그대로 바다가 되고 만다. 아망바우 못미쳐 새끼내도 범람하고, 그 덕에 새끼내뜰은 바다가 되고 집이든 나무든 모두 잠기고 만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썰물이 되어도 소용없다. 특히 장마가 지나고 백중을 전후해서 찾아오는 태풍이 큰비를 몰고 오면, 백중사리라고 해서 해안이 잠기고 그에 따라 강에서 내려가는 물도 빠지지 못한다. 비가 그치고 며칠 지나서 썰물과 함께 강물이 바다로 내려간 후에라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물이 쓸어가고도 남겨둔 것들을 챙겨보는 것이다.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위대한 힘을 그렇게 시시때때로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알려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으련만….
강한 생명력의 터전, 영산강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강가로 나온다. 바닷물이 들어와 민물과 섞이는 이 강에는 작은 털게가 강에서 뭍으로 오른다. 뭍으로 오른 털게는 갈대밭으로 와서 갈대에 매달린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오랜 옛날부터 털게는 밤이면 갈대에 열매 열리듯 열리고,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털게를 따러 다녔다. 농사를 힘겹게 지어도 수탈을 당해 항상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했다. 아이들조차 봄이면 어린 띠풀 속에 숨겨져 있는 삐비를 뽑았고, 어른들은 쑥과 봄나물, 물오른 소나무 생키를 벗겨다 묽은 죽을 쑤어서 연명했다.
참게도 있다. 참게가 강에서 논으로 올라올 때는 모를 심고 벼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부드러운 상태일 때, 집게발로 단맛이 나는 벼 줄기를 썰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대를 베어다 논둑 안으로 게가 걸어갈 만큼 꽂아서 길을 만들어놓고는 그 끝에 항아리를 묻어놓았다. 그러면 참게는 갈대로 만든 벽에 막혀 벼 있는 곳으로 못가고 갈대벽을 쭈욱 따라가다가 항아리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벼를 지키면서 참게를 잡아 참게장을 담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애잔한 농민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위대한 발견과도 같다. 힘 있는 자들을 먹여 살리고 게다가 심하게 수탈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그 위대한 발견으로 인한 것이다. 짠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은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풍요롭다. 산골에서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서 산이 주는 혜택을 받지만, 짠물이 드는 강에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 혜택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나주평야처럼 너른 들판에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그리 흔치 않은 자연적 조건을 가진 곳은 별로 없다.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물고기도 많았고, 그 안에서 사는 생물도 다양했다. 맛과 바지락이 그랬고, 산란을 위해 올라오는 숭어와 복, 웅어가 그랬고, 동강면 수문리 장어가 그랬다. 숭어는 찜으로 차례상에 올랐고, 알은 귀한 어란의 재료가 되었다. 복 역시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랐는데, 노안면 학산리의 복바위에 머리가 닿으면 비로소 황복이 된다고 했고, 웅어 역시 산란을 위해 거슬러 오르다가 보리가 팰 무렵 다시면 지역에서 잡은 것이 기름지고 최고의 회무침으로 나주 사람들의 입맛에 남아 있었다. 강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나주평야는 최고의 강점기 수탈 대상
영산강은 중류에 위치한 나주와 영산포로 인해 역사적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나주는 통일신라 때 금성(錦城)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영산강을 금강(錦江)이라 불렀고 그 나루터를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 섬에 설치한 행정구역인 장산현, 압해현, 영산현 등이 왜구를 피해 나주목으로 이주하였다. 그 가운데 영산현은 남쪽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공민왕 때 영산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 초 나주목에 폐합되었다. 그곳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시대 초기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창인 해릉창이 있었던 곳인데, 1천 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을 6척 운영했으며, 조선시대 들어선 이후 영산창으로 이어진다. 말이 1천 석이지 무게로 치면 1백 톤이 넘는 양이다. 1백 톤을 싣는다면, 배 역시 1백 톤이 넘어야 하니까 이 초마선, 엄청나게 큰 배다.
전국적으로 바다를 메꾼 간석지를 제외하면 호남평야 다음으로 영산강 유역의 나주평야가 넓다. 조선조 말 그래서 나주는 전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고장이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엄청난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지역이라는 말과 통한다. 1905년 일본 와카야마(和歌山)현으로부터 구로스미이타로(黑住猪太郞)를 필두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이주를 해오는 것 역시 나주평야의 풍부한 생산력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승촌보의 조형물
가끔 자전거를 타고 승촌보를 가면 쌀을 형상화했다는 조형물이 LED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쌀이려니 했다. 그런데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메꿀 길이 없었다. 씨눈이 떨어져나간 녹말덩어리일 뿐인 쌀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분노가 치밀었다. 승촌보의 쌀 조형물은 다시 재생산되어 꽃을 피우는 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사라져버리는 식량으로써의 쌀이다. 권력자들로부터 수탈을 당해온 영산강의 우리 농민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조형물이 아니라 우리 입으로 들어와서 소화되어 사라지고 마는 쌀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미안에도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철선 하나로 쌀눈을 채워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Cook&Chef 조용수 기자]
* 김 준 혁
- 소설가
- 전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 나주문화원 사무국장(199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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