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국화, 장수를 빚다

이지헌 전문기자

| 2025-10-23 14:13:02

국화주  사진 = 한식진흥원

[Cook&Chef = 이지헌 전문기자] 가을의 끝자락, 상강 무렵이면 들판의 국화는 서리를 머금고 더욱 깊은 향을 낸다. 찬 기운이 도는 계절이지만, 오히려 이때의 국화는 가장 깊은 향을 품는다. 국화는 예로부터 늙지 않는 꽃, 불로초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 글은 향기와 술로 가을을 닫는 국화의 이야기다.

화양산의 신선, 국화를 마시다

국화주의 전통은 중국 한대(漢代)에서 비롯된다. 북위 시대의 학자 이도(酈道元)가 지은 『수경주(水經注)』에는 “華陽山有仙人服菊以延年(화양산에 신선이 있어 국화를 복용함으로써 장수를 누렸다.)”라는 구절이 실려있다. 

이 기록은 국화가 단순한 꽃을 넘어 장생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출발점이었다. 『진서(晉書)』 「유홍전(劉弘傳)」에는 “九月九日佩茱萸,食蓬餌,飮菊花酒,以延年(아홉째 달 아홉째 날에는 차조기를 지니고, 쑥떡을 먹으며, 국화주를 마셔 장수를 누린다.)”라 하여, 음력 9월 9일 중양절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선이 마신 꽃이 백성의 술로 내려온 것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 권13 “국화” 항목에서도 “久服利氣輕身耐老(오래 복용하면 기운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져 늙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어 국화는 장수의 약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상이 수경주의 신선 설화와 결합하면서 국화로 만든 술이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증보산림경제」에도 국화주를 “늙지 않고 오래 살게 하는 술”이라 기록해, 국화주가 장수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 내린 국화주, 기로연의 잔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9월 9일 기록에는 왕이 나이 많은 신하들을 위해 기로연(耆老宴)을 열고 국화주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그날은 바로 중양절이었다. 기로연에서 기(耆)는 70세를 말하며 로(老)는 80세를 뜻한다. 

“국화의 향으로 복을 들이고, 그 빛으로 장수를 빈다”는 말처럼, 왕은 늙은 신하에게 국화주 한 잔을 내리며 그들의 장수를 축복했다. 조선의 궁궐에서도 국화주는 노년의 지혜와 장수의 상징주였던 것이다. 꽃잎을 띄워 마시거나 향을 우려내 빚은 술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하여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었으며, 중양절의 국화주는 그렇게 왕실의 장수주이자 민간의 장생주로 자리 잡았다. 

문인들의 영감의 샘터, 국화주

문인들은 국화를 절개와 인내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국화는 서리를 만나야 향이 더욱 짙어진다”라 하였고, 시인 서거정은 “서리 속의 국화”라 읊었다. 

성삼문의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에 <무계수창시에 차운하다>라는 시에는 “동이엔 중추절 밝은 달빛이 잠기고, 술잔엔 중양절의 국화꽃 향기기 가득하네. 서리에 물든 단풍가지는 임야를 수놓았고, 바람으로 우는 솔잎은 산의 풍류를 보내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써 문인과 풍류객 사이에서 국화주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양절에 산음(山飮)이라 하여 국화가 피는 가을에 산에 올라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동이에 감국잎을 띄워 두고, 잔으로 떠 마시는 풍류 사례가 있었다. 향으로 계절을 마시는 삶의 미학이었다. 

국화주 빚는 방법

국화주를 빚는 주방문을 수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문헌으로는 『고사신서』를 비롯해 『동의보감東醫寶鑑』, 『온주법蘊酒法』,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규곤요람閨壼要覽』 「주식방酒食方」, 『홍씨주방문』 등 16가지 문헌에 18회나 등장한다. 이들은 국화주의 여러 주법을 전한다. 

첫째, 청주에 직·간접적으로 국화의 향기만을 스며들게 하는 ‘화향입주방花香入酒方’이다. 국화가 만개했을 때 꽃을 송이째 채취해 청주에 직접 띄워 향을 우려내거나, 건조 시킨 감국 2냥을 생사 주머니에 담아 청주와 손가락 한 마디쯤 떨어지게 매단 뒤 밀봉해 하룻밤 지난 뒤 건져내는 방식이다. 

둘째, 다 익은 술에 말린 국화를 넣고 휘저은 후 3~4일 뒤 거르는 ‘지약주중법漬藥酒中法’이라 한다. 국화 향기와 색, 효능까지 얻기 위한 방식으로, 향이 짙고 술맛이 무거우며 풍미가 살아난다.

셋째, 감국을 달인 즙에 누룩가루를 섞어 빚거나 국화를 약재와 함께 넣어 발효 시키는 방식도 있다.

넷째, 국화를 주재료로 찹쌀 고두밥과 누룩, 끓여 식힌 물이나 국화 달인 물을 넣고 술을 빚어 한 번 또는 두 번 발효시키는 이양주법도 있다.

이제 곧 서리가 내릴 것이다. 상강이 다가오는 이때, 찬 서리를 견디며 피어난 국화 향을 담은 술 한 잔을 곁에 두어보자. 상강의 문턱에서 마시는 국화주의 향이, 한 해의 끝을 따뜻하게 감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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