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에 빠진 스위스, 퐁듀에 모인 스위스

정수연 기자

cnc02@hnf.or.kr | 2026-07-17 15:00:53

산악의 치즈 문화가 한 나라의 식탁이 되기까지

[Cook&Chef = 정수연 기자] 식탁 한가운데 작은 불이 켜진다. 둥근 카클롱 안에서는 치즈가 느릿하게 풀어지고, 긴 포크 끝에 빵을 끼운 사람들은 저마다 차례를 기다린다. 접시는 따로 놓여 있어도 시선은 한곳으로 향한다. 퐁듀를 먹는 동안 식사의 중심은 사람 앞에 놓인 접시가 아니라 모두의 손이 오가는 냄비인 것이다.

퐁듀는 이제 알프스와 시계, 초콜릿을 잇는 스위스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 익숙한 풍경이 처음부터 스위스 전역의 전통이었던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퐁듀는 프랑스어권 서부에서 주로 먹었고, 독일어권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낯선 음식에 속했다.

그렇다면 서부의 한 지역에서 끓던 치즈 냄비는 어떻게 한 나라의 식탁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그 답을 찾으려면 퐁듀가 전국으로 퍼진 20세기보다 훨씬 이전, 우유를 오래 붙잡아두어야 했던 알프스의 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산은 곡식보다 소를 키웠다

스위스에는 산이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산이 곡식을 넉넉히 길러내는 밭보다 소가 풀을 뜯는 목초지를 더 많이 내어주었다는 점이다.

경사가 가파르고 작물을 키울 수 있는 계절도 짧았던 알프스에서는 밭농사만으로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풀을 사람이 먹을 곡물로 바꾸는 대신, 소에게 먹인 뒤 우유로 얻는 방식을 택했다. 여름이면 소 떼를 높은 목초지로 올려 보내고, 목동들은 그곳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우유를 짰다.

문제는 우유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갓 짠 우유는 빠르게 상했고, 산 위에서 나온 많은 양을 매일 마을까지 나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분을 덜어내고 눌러 숙성시키자 우유는 부피가 줄어든 채 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된다. 여름 산등성이에서 얻은 우유가 겨울의 식탁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치즈는 저장식이면서 교역품이기도 했다. 산 아래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었고 국경 밖으로도 보낼 수 있었으니, 목축과 치즈 제조는 스위스 산악지대의 중요한 생업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목초와 기후, 숙성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그뤼예르와 에멘탈, 바슈랭과 아펜첼러처럼 지역의 이름을 품은 치즈도 하나둘 늘어갔다.

스위스 사람들이 치즈를 많이 먹게 된 까닭을 입맛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위스의 땅은 소를 길렀고, 사람들은 우유를 치즈로 바꾸어 계절을 건너왔다.


서부의 겨울은 치즈를 녹였다

오래 보관한 치즈는 점점 단단해지고, 한 번 구운 뒤 며칠씩 먹던 빵에서도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대로 먹기에는 버거워진 두 재료를 다시 한 끼로 불러들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치즈에 와인을 부어 천천히 풀어내고, 굳은 빵을 따뜻한 치즈 속에 담그자 두 저장식품은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치즈는 부드럽게 흘렀고 빵은 다시 촉촉해졌으며, 하나의 냄비로 여러 사람이 배를 채울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퐁듀’라는 이름 역시 프랑스어로 ‘녹이다’를 뜻하는 ‘퐁드르’에서 나왔다)

치즈를 와인에 녹여 빵을 담가 먹는 조리법은 1699년 취리히에서 출간된 책에도 등장한다. 다만 기록이 발견된 장소와 음식이 생활 속에 뿌리내린 지역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퐁듀라는 이름은 한동안 달걀과 치즈를 함께 익힌 다른 요리에도 쓰였고, 지금의 형태는 여러 조리법이 오랜 시간 겹치면서 조금씩 갖춰져 갔기 때문이다.

치즈를 녹여 나누는 식사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곳은 프랑스어권 서부였다. 냄비 안에는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서 생산한 치즈가 들어갔다. 프리부르주의 ‘모아티에 모아티에’가 그뤼예르와 바슈랭 프리부르주아를 절반씩 섞는 것도 이 때문이다. 퐁듀는 하나의 고정된 맛이라기보다 각 지역의 치즈를 가장 따뜻한 상태로 펼쳐 보이는 식사에 더 가까웠다.

가난한 목동이 남은 치즈와 굳은 빵을 녹여 퐁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쉽고 장면도 선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숙성 치즈는 해외로 팔려 나가던 값진 상품이었으며, 농촌의 빈곤층이 늘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재료도 아니었다. 퐁듀의 역사는 어느 겨울밤 한 사람의 재치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 산악지대의 목축, 치즈의 생산과 거래, 서부의 식생활이 여러 세대에 걸쳐 포개지며 형성되어온 셈이다.

그럼에도 퐁듀는 오랫동안 서부의 식탁에 머물렀다. 스위스의 산이 치즈를 만들고 서부의 겨울이 치즈를 녹였지만, 아직 그 냄비 안에 스위스 전체가 모인 것은 아니었다.


광고가 제안하고 식탁이 완성한 국민 음식

이 서부의 냄비를 스위스 전역으로 옮긴 것은 20세기의 치즈산업이었다. 1914년 설립된 스위스 치즈 연맹은 치즈의 생산량과 가격, 유통과 수출을 폭넓게 관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생산된 치즈를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일까지 연맹의 과제로 떠오른다.

많은 양의 치즈를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고, 조리 과정도 어렵지 않으며,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서 오래 먹을 수 있는 음식. 퐁듀는 치즈 소비를 늘리려던 연맹의 고민에 꼭 맞는 답처럼 보였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퐁듀를 스위스의 대표 음식으로 내세운 홍보가 이어졌고, 전쟁 이후에는 독일어권 주민을 위한 무료 시식회도 열렸다. 군대 역시 지역의 경계를 허무는 통로가 됐다.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 모인 병사들이 한 냄비에 빵을 담그며 퐁듀를 익혔고, 제대한 뒤에는 그 식사법을 각자의 고향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퐁듀는 맛있고 기분을 좋게 한다”는 의미를 담은 광고 문구 ‘FIGUGEGL’도 이 시기에 널리 알려졌다. 치즈 연맹이 판매한 것은 치즈의 맛만이 아니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가족과 친구가 냄비를 둘러싸고 웃는 장면까지 퐁듀의 이미지 안에 함께 담아낸 것이다.

그렇다고 광고 한 번으로 국민 음식이 탄생할 수는 없다. 홍보를 통해 처음 냄비를 꺼낸 사람이 있었다면, 이듬해 겨울에도 다시 냄비를 꺼낸 사람도 있었을 터다. 손님을 부르고 치즈를 녹이며 같은 식사를 거듭하는 동안 캠페인의 이미지는 생활의 습관으로 바뀌어갔다.

스위스 치즈 연맹이 퐁듀를 국민 음식으로 제안했다면, 그 제안을 실제 전통으로 완성한 쪽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각자의 포크가 하나의 냄비로 향할 때

치즈를 활용한 스위스 음식은 퐁듀 외에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퐁듀가 전국적인 상징으로 남았을까. 그 이유는 냄비 안의 맛과 함께 냄비를 둘러싸는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퐁듀에서는 각자 완성된 접시를 받아 들지 않는다. 식탁 가운데 카클롱 하나를 놓고, 사람들은 저마다 긴 포크에 빵을 끼워 치즈 속으로 가져간다. 손잡이에 새겨진 색으로 자신의 포크를 구분하지만 빵이 향하는 자리는 언제나 하나다.

치즈는 온도가 내려가면 금세 굳고, 불이 지나치게 강하면 냄비 바닥에 눌어붙는다. 자연히 먹는 사람들도 불의 세기와 치즈의 상태를 함께 살피게 된다. 빵을 넣은 포크로 치즈를 저어주고, 다음 사람이 손을 뻗을 자리를 비켜주며, 치즈가 굳지 않도록 먹는 속도도 맞춘다.

누군가 빵을 놓치면 웃음과 벌칙이 이어진다. 식사가 끝날 무렵 냄비 바닥에 얇게 눌어붙은 치즈를 떼어 나누는 순간도 기다리고 있다. ‘라 르리지외즈’라 불리는 이 마지막 조각까지 맛본 뒤에야 퐁듀 식사는 끝난다.

빨리 먹고 일어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다. 치즈가 녹기를 기다리고, 빵이 포크에서 빠지지 않도록 손을 움직이며, 냄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차례를 살피다 보면 대화도 자연히 길어진다. 퐁듀가 채우는 것은 배만이 아니라 한 식탁에 함께 머무는 시간인 셈이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로만슈어를 사용하는 지역들이 하나의 연방을 이루는 스위스에서 이 장면은 더욱 인상적으로 읽힌다. 지역마다 쓰는 언어도 다르고 냄비에 넣는 치즈도 다르지만, 퐁듀 식탁에서는 저마다의 포크를 든 채 하나의 냄비를 함께 돌본다.

퐁듀가 스위스의 연방 구조를 본떠 만들어진 음식은 아니다. 다만 서로의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자리에 참여하는 모습이 스위스라는 나라의 풍경과 묘하게 포개지는 것은 사실이다. 치즈 연맹이 수많은 음식 가운데 퐁듀를 선택했고, 사람들이 그 선택을 오래 받아들인 까닭도 어쩌면 이 장면 안에 있었을 것이다.


산장 한 채로 스위스를 보여주는 법

여러 지역을 하나의 식탁으로 보여준 퐁듀의 이미지는 해외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스위스의 언어와 정치제도, 산악 목축의 역사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눈 덮인 산장과 뜨거운 치즈 냄비만 보여주면 되었기 때문이다.

1939~1940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퐁듀가 소개된 뒤 국제적인 인지도는 한층 높아졌다. 전후 관광산업 역시 알프스와 목조 산장, 젖소와 치즈 냄비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어냈다. 여행자는 목초지에서 소를 기르고 우유를 치즈로 숙성시키는 긴 시간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퐁듀 한 끼를 통해 스위스의 겨울을 맛볼 수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는 퐁듀 파티가 유행했고, 뜨거운 기름이나 육수에 고기를 익히는 방식과 녹인 초콜릿에 과일을 담그는 디저트까지 퐁듀의 이름 아래 퍼져나갔다. 형태는 여러 갈래로 넓어졌지만 그 중심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전히 알프스의 치즈 냄비였다.

산을 통째로 옮길 수는 없다. 그러나 산에서 만들어진 치즈와 사람들이 그 치즈를 나누는 방식은 어느 나라의 식탁에서도 재현할 수 있다. 퐁듀는 그렇게 스위스의 자연과 겨울, 사람들의 모임을 세계인이 먹어볼 수 있는 한 끼로 바꾸어놓았다.


치즈를 녹여, 스위스를 잇다

다시 식탁 한가운데 놓인 카클롱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녹고 있는 시간이 보인다. 곡식보다 목초지를 내어준 산과 여름의 우유를 겨울까지 데려간 치즈, 서부 지역에서 치즈를 녹여 빵과 나눠온 생활이 한 냄비 속에 포개져 있다.

여기에 치즈 연맹의 광고와 군대의 집단 경험, 세계박람회와 관광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서부의 지역 음식은 마침내 스위스의 얼굴이 되어갔다. 그러나 국민 음식을 완성한 마지막 힘은 제도나 홍보보다 매년 반복된 식사에 있었을 것이다.

겨울이 오면 사람들은 다시 냄비를 꺼낸다. 가족과 친구를 불러 모으고, 치즈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저마다의 포크를 식탁 가운데로 가져간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몇 세대의 식사가 쌓이자, 한때 서부에 머물렀던 음식은 스위스 전체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퐁듀가 스위스를 상징하는 까닭은 치즈를 많이 넣은 음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지역, 각자의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의 냄비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나누어왔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스위스의 산이 치즈를 만들었다면, 퐁듀는 그 치즈 앞에 사람들을 모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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