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맛본다” — 찰스 스펜스의 《왜 맛있을까》를 읽고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30 10:01:19

사진 = 교보문고

[Cook&Chef = 이경엽 기자] 어느 날, 나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한 잔의 음료가 아닌, 하나의 세계를 만났다.
메뉴판에는 ‘공감각 커피, Synesthesia Coffee’라는 낯선 단어가 적혀 있었다.
태블릿을 통해 평소 선호하는 커피의 향미와 산미, 로스팅 정도를 고르면 16가지 스페셜티 원두 중 하나가 추천된다.

주문이 끝나면 커피와 어울리는 시 한 편이 화면에 뜨고, 이어서 음악이 재생된다.
좌석에 비치된 헤드셋을 쓰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맛이란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완성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찰스 스펜스의 《왜 맛있을까》를 읽으면서 그때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 일어나는 과학적, 심리학적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스펜스는 옥스퍼드 대학의 실험심리학자이자,
‘가스트로피직스(Gastrophysics)’—미식학과 물리학을 결합한 새로운 학문—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묻는다. “당신이 방금 느낀 그 맛, 정말 음식 때문일까?”

혀가 아닌, 뇌에서 완성되는 맛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사실 얼마나 복잡한 감각의 합주인지 놀라게 된다.
음식의 색과 냄새, 식기의 질감, 심지어 그릇의 무게와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뇌 속에서 서로 얽히며 하나의 맛을 빚어낸다.
스펜스는 이를 ‘다감각적 통합(multi-sensory integration)’이라 부른다.
즉, 맛은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실험 중 하나가 흥미롭다.
사람들에게 같은 디저트를 붉은 조명 아래와 푸른 조명 아래에서 먹게 했을 때,
붉은 조명에서는 더 달콤하게, 푸른 조명에서는 더 시큼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음의 바이올린 소리는 단맛을,
저음의 첼로는 쓴맛을 강화시켰다.
결국 ‘맛’은 음표와 색, 질감이 함께 만들어내는 하나의 심포니였다.

스펜스의 주장은 결국 이것이다.
“맛은 음식에 있지 않다. 맛은 경험 안에 있다.”
우리가 식탁 앞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혀의 일이 아니라, 뇌의 작품이라는 것.
그 말은 곧 ‘맛있다’는 감탄이 단순한 생리 반응이 아니라
기억, 감정, 문화가 함께 작동하는 감각의 서사임을 의미한다.

먹방의 나라, 스펜스가 본 한국

이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한국의 먹방 문화가 언급된 대목이었다.
스펜스는 한국의 먹방을 단순한 유행이 아닌 ‘감각의 대리 경험’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먹방은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
시청자에게 실제 식사에 버금가는 만족감을 제공한다.
누군가 라면을 후루룩 먹는 소리, 젓가락이 부딪히는 금속음,
그릇에서 김이 오르는 장면—
이 모든 것이 ‘가상의 식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먹방을 본 사람들은
식욕이 증가할 뿐 아니라 음식에 대한 집중도까지 높아진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춰 생각했다.
한국의 먹방은 단지 과식의 상징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다감각적 식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징후일까.
TV나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시각으로 음식을 ‘맛보고’,
소리로 식욕을 ‘느끼고’,
심지어 그 분위기를 통해 ‘함께 먹는 경험’을 한다.
스펜스가 말하는 ‘공감각의 식탁’은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

오감으로 먹는다는 것의 의미

책 속의 예시는 우리의 일상에도 쉽게 겹쳐진다.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종이컵의 커피가 왜 밋밋하게 느껴지는지,
비행기에서 먹는 기내식이 왜 늘 싱겁게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이 책은 명확히 보여준다.
후각이 차단되거나, 기압과 습도가 변하면 향과 풍미는 30% 이상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공사들은 소금과 설탕을 더 넣는다.
즉, ‘환경이 맛을 조정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한 셈이다.

우리는 이제야 깨닫는다.
식탁은 단순한 섭취의 공간이 아니라, 감각이 교차하는 무대라는 것을.
음식의 향은 공기의 질감과 만나고,
접시의 무게는 손끝의 기억으로 남는다.
스펜스는 말한다. “결국 식사가 끝나면 남는 것은 기억이다.”
좋은 음식은 혀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경험을 남긴다.
그 기억이 바로 ‘맛의 본질’이다.

맛의 기억, 경험의 디자인

《왜 맛있을까》를 덮은 뒤 나는 다시 공감각 커피를 떠올렸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시를 읽었던 그 순간이
왜 그렇게 진하게 남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건 단순히 좋은 원두 때문이 아니라,
나의 오감이 한꺼번에 깨어났던 경험 때문이었다.
스펜스가 말한 대로, “맛있음은 디자인된다.”

이 책은 셰프와 소비자 모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먹고 있는가?
그 음식이 ‘어떤 맛인가’보다,
‘어떤 감각을 깨우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셰프라면 맛을 넘어 경험을 설계해야 하고,
소비자라면 눈앞의 음식 속에서 다섯 감각이 어떻게 협연하는지를 느껴야 한다.

 “왜 맛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기

찰스 스펜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맛있다’는 말을 새롭게 배웠다.
그 말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감각의 조화가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언어였다.
음식은 혀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코, 손끝, 그리고 마음으로 먹는다.
우리가 먹는 것은 결국 맛이 아니라 기억이며, 감정이며, 순간의 공기다.

어쩌면 ‘왜 맛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하루 세 번의 식사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감각을 교환하며 살아간다.
그 감각을 의식하는 순간, 일상의 식탁은 실험실이 되고,
한 모금의 커피는 하나의 예술이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묻는다.
“오늘 나는 무엇을 먹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있던 ‘맛의 본질’을 되찾게 하는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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