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보릿고개를 넘어 식탁으로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6-05 16:29:53

한국인의 삶을 지탱한 곡물, 보리의 과거와 현재 [사진=대한민국 구석구석 / 고창 청보리밭]

[Cook&Chef = 서진영 기자]초여름이 시작되는 6월, 들판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봄 내내 푸른 물결을 이루던 보리밭은 어느새 고개를 숙인 채 수확의 계절을 알리는  이 시기를 ‘맥추(麥秋)’라 불렀다. 이름 그대로 보리의 가을이라는 뜻이다. 계절은 여름을 향하고 있지만 농경의 시간 속에서 보리가 익어가는 순간만큼은 또 하나의 가을로 여겨졌다.

보리는 건강식품이나 잡곡밥의 재료지만,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보리는 생존을 의미하는 곡물이었다. 배고픔을 견디게 했고,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어주었으며,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밥상을 지켜온 삶이였다.

한반도에 뿌리내린  오래된 곡물

보리는 한반도에서 오래된 재배 작물 중 하나이다.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탄화된 보리 종자가 발견되며,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보리가 재배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리는 조와 기장, 피와 함께 초기 농경사회의 중요한 식량으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의 식생활을 책임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오래 재배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가을에 씨를 뿌려 추운 겨울을 힘겹게 나고 다음 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월동작물이라는 특성 덕분이다. 여름에 수확하는 벼와 재배 시기가 겹치지 않아 한정된 농경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추위와 가뭄에도 비교적 강해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했다.

세종대에 편찬된 《농사직설》을 비롯해 조선 후기의 《산림경제》와 《임원경제지》에는 보리 재배와 저장, 가공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보리가 단순한 구황작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을 지탱한 주요 곡물이었음을 엿볼수다. 오늘날 우리는 쌀을 한국인의 대표 주식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오랜 세월 우라의 밥상은 보리와 더욱 가까웠다.

보릿고개, 굶주림의 계절을 건너게 한 곡물

보리를 말 할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보릿고개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 이 표현은 실제 의미보다 다소 가볍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농촌에서 보릿고개는 단순히 형편이 어려운 시기가 아니라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바닥나고, 새로 심은 작물은 아직 여물지 않은 시기. 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면서 동시에 가장 배고픈 계절이었다.

추운 겨울 동안 저장해 두었던 곡식독은 비어갔고 사람들은 냉이와 달래, 쑥과 같은 봄나물로 허기를 달랬다. 덜 익은 보리 이삭을 불에 구워 먹거나 보릿겨를 섞어 죽을 쑤어 먹는 일도 흔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 시기 가장 먼저 수확되는 곡물이 바로 보리였다. 초여름 들판에 보리가 익기 시작하면 농민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보리 수확은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지녔다. ‘보릿고개를 넘는다’는 표현에는 실제로 굶주림의 고비를 넘는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지역의 풍토가 만든 보리 문화

보리는 전국 어디에서나 재배되었지만 지역마다 서로 다른 식문화와 풍경을 만들어냈다.

전라남도 고창과 해남, 고흥 일대는 대표적인 보리 산지로 꼽힌다. 겨울이 온화하고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 대규모 재배가 가능했으며, 오늘날에도 초여름 황금빛 보리밭 풍경으로 유명하다.

품종 또한 다양하다. 겉보리는 전통적인 보리밥과 보리차의 원료가 되었고, 쌀보리는 껍질을 제거해 부드러운 식감을 살린 품종이다. 찰보리는 찰기가 높아 떡과 혼반용 곡물로 널리 활용되었으며, 흑보리는 안토시아닌을 함유한 기능성 곡물로 주목받고 있다. 같은 보리라도 품종에 따라 향과 식감, 용도가 달라 다양한 음식 문화로 이어졌다.

제주, 보리를 문화로 만든 섬

[사진 = 곶자왈 제주 쉰다리]

화산토와 강한 바람, 제한적인 논농사 환경 속에서 보리는 오랫동안 제주인의 주곡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20세기 후반까지도 많은 제주 가정에서 보리밥은 일상적인 식사였다.

제주 사람들은 보리로 개역(제주도식 보리 미숫가루)과 범벅을 만들고, 보리떡과 빙떡, 보리빵 등 다양한 향토 음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볶은 보리를 곱게 갈아 만든 보리개역은 더운 여름철 갈증을 달래고 농번기 노동의 허기를 채워주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제주를 대표하는 전통 발효음료인 쉰다리 역시 보리 문화에서 탄생했다. 쉰다리는 보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뒤 끓여 만드는 음료로, 더운 여름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마셨다. 쉽게 쉬어버리는 보리밥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음식으로 재탄생시킨 제주인의 생활 지혜가 담겨 있다.

최근에는 쉰다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들이 출시되며 제주 전통 발효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과거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던 음식이 오늘날에는 지역 브랜드와 관광 콘텐츠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초여름을 물들이는 청보리의 가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밭은 한국 농촌을 대표하는 풍경 가운데 하나다. 특히 전남 고창과 고흥, 제주 등지의 청보리밭은 매년 수많은 방문객을 불러들이며 지역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청보리는 특정 품종이라기보다 보리가 완전히 익기 전 푸른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곡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화경관으로 자리 잡았다.

어린 청보리잎은 식이섬유와 폴리페놀, 비타민, 미네랄 등을 함유하고 있으며, 특히 베타글루칸 성분은 건강식품 분야에서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 청보리순 분말과 음료, 차 제품 등이 출시되며 보리의 활용 범위가 건강기능식품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제주 역시 청보리를 지역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청보리밭은 관광 콘텐츠가 되었고, 청보리를 활용한 가공식품과 음료, 베이커리 제품이 개발되며 새로운 지역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작물이 지역 산업의 자산으로 변화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가난의 곡물에서 지역 브랜드로

오늘날 보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건강한 식생활과 로컬푸드, 지속가능성을 상징하는 식재료이자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문화 자원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벗어나고 싶었던 음식이 오늘날에는 일부러 찾아 먹는 음식이 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국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라남도 영광의 보리굴비는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에서 전국적인 외식 메뉴로 성장했다. 조기를 보리 속에 저장해 숙성시키던 전통적인 지혜는 오늘날 지역 특산품으로 자리 잡으며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청보리는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남 고창의 청보리밭과 제주 가파도의 청보리 경관은 수많은 방문객을 불러들이는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보리는 생존을 위한 작물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다시 산업이 되는 과정 속에서 보리는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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