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입춘의 음식, 비움으로 시작되는 식탁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2-05 17:17:57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입춘의 음식은 봄을 먹기보다, 봄이 들어올 자리를 몸 안에 비워주는 음식이다.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라, 조선 시대 절기 인식과 식생활 구조를 설명하는 분석적 정의에 가깝다.
입춘은 스물네 절기 중 첫 번째에 해당하지만, 조선 시대의 생활 리듬에서 입춘은 ‘봄의 시작’이라기보다 ‘겨울의 종료를 선언하는 시점’이었다. 이는 기후 조건과 식재 환경을 고려하면 명확해진다. 입춘 무렵에는 새 작물이 거의 없고, 식생활의 중심은 여전히 저장식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입춘 음식은 풍요를 전제할 수 없었고, 계절 변화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음식 선택을 관통하는 핵심 기준은 보양이나 영양 보충이 아니라, 신체 상태의 전환이다.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 기록된 입춘 풍속을 보면, 음식은 항상 ‘새 기운을 들이기 위한 준비 행위’로 설명된다. 이는 입춘 음식이 적극적으로 무엇을 더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상태를 정리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이 전환 논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신채다. 오신채는 특정 요리명이 아니라, 재료 선택의 기준에 가깝다.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처럼 신온한 성질을 지닌 채소들은 공통적으로 발산과 순환의 기능을 가진다. 이 재료들은 체력을 축적하거나 열량을 공급하지 않는다. 대신 겨울 동안 정체된 기혈의 흐름을 자극해, 몸이 계절 변화에 반응할 수 있는 상태로 이동하도록 돕는다.
중요한 점은 이 재료들이 ‘강한 맛’으로 소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가에서는 날것에 가까운 형태로 섭취되었지만, 이는 자극을 즐기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조리 자원이 제한된 환경에서 계절 변화를 가장 빠르게 감지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궁중에서는 같은 재료를 데치거나 절여 성질을 완화했다. 이는 입춘을 급격한 변화의 시점이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경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오신채는 모든 계층에서 공유되었지만, 그 처리 방식은 계절을 다루는 태도의 차이를 반영한다.
입춘 무렵의 국과 탕 역시 동일한 분석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선택된 국은 냉이나 달래처럼 이른 봄에 접근 가능한 재료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기름기와 단백질 비중이 낮다. 『규합총서』에 나타난 봄철 식생활 지침은 지나치게 농후한 국물을 경계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는 입춘을 보양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보양은 기운이 충분히 열린 이후의 문제였고, 입춘은 그 이전 단계에 해당했다.
음청류의 성격은 이 시기의 음식 논리를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입춘에 마신 차와 술은 기호품이라기보다 상태 조절 수단이었다. 도소주가 설 이후에도 입춘까지 이어진 것은 축하의 연장이 아니라, 잡기를 제거하고 신체를 정돈하는 의례적 기능 때문이다. 『산가요록』에 등장하는 매화차·국화차·오미자차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이 음청류들은 열을 보태거나 흥분을 유도하지 않고, 저장된 재료를 활용해 계절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기기 위한 장치였다.
입춘에 병과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유도 이 구조 안에서 설명된다. 다식이나 약과가 곁들여질 수는 있었지만, 이는 절기의 중심이 아니었다. 입춘의 핵심 행위는 입춘첩을 붙이고 한 해의 질서를 정립하는 데 있었으며, 음식은 그 의례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되었다. 다시 말해 입춘에는 ‘대표 음식’보다 ‘대표 원칙’이 존재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입춘 음식은 계절 변화에 대한 조선 시대의 합리적 대응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자연 조건이 아직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몸의 상태만 먼저 바꾸는 방식이다. 이는 계절을 앞서 소비하지 않고, 계절과의 시간차를 관리하는 태도에 가깝다.
이러한 입춘 음식의 구조를 오늘의 식탁에 적용한다면, 기준은 분명하다. 몸에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몸이 계절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전환되는가이다. 입춘에 어울리는 음식은 강하지 않고, 무겁지 않으며, 즉각적인 포만이나 활력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겨울의 관성을 정리하고, 다음 계절이 들어올 여지를 남긴다.
그 기준에서 가장 입춘다운 한 그릇은 달래나 냉이를 중심으로 한 맑은 국이다. 이 국은 보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른 봄에 접근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 겨울 저장식 위주의 식생활에서 벗어나는 신호를 몸에 전달한다. 된장이나 간장으로만 간을 맞춘 국물은 소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정보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오신채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날것에 가까운 달래 무침이나 가볍게 데친 부추 무침이 적절하다. 중요한 것은 매운맛의 강도가 아니라, 자극의 방향이다. 고추나 마늘의 양을 늘려 몸을 데우는 것이 아니라, 향과 식감을 통해 몸의 감각을 깨우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입춘을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인식했던 전통적 관점과 맞닿아 있다.
음청류 또한 입춘의 의미를 가장 단순하게 구현할 수 있는 선택지다. 매화차나 국화차, 오미자차처럼 저장된 재료로 우린 차는 새로운 것을 들이기보다, 겨울동안 쌓인 리듬을 정리한다. 당도를 낮춘 음청류는 입춘이 축하의 절기가 아니라, 전환의 절기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