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지도를 따라 떠나는 여정...K-치킨벨트가 그리는 새로운 미식 풍경
이경엽 기자
cnc02@hnf.or.kr | 2026-06-30 17:57:03
[Cook&Chef = 이경엽 기자] 어느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작은 식당. 고소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이끌려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 만난 인생 요리 하나가 여행 전체를 특별하게 만들었던 기억,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웅장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유적지를 눈에 담는 것을 넘어, 이제는 혀끝으로 그 지역의 문화를 기억하고, 코끝으로 그곳의 공기를 추억하는 ‘미식’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외래관광객조사에 따르면, 방한 시 가장 하고 싶은 활동으로 ‘식도락 관광’이 61.7%를 차지하며 쇼핑(57.3%)을 앞질렀다. 이제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강력한 경험 콘텐츠이자 한 나라의 문화를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아주 흥미로운 지도를 펼쳐 보였다. 이름하여 ‘K-미식 여정(K-Gastronomy Journey)’. 그 설레는 여정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치킨’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야심 차게 공개한 ‘K-치킨벨트 플랫폼’은 단순한 맛집 리스트가 아니다. 이것은 치킨 한 조각에서 시작해 지역의 숨겨진 이야기와 다채로운 문화를 탐험하도록 이끄는 한 편의 초대장과 같다. K-푸드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지금, 우리는 맛을 따라 떠나는 여행을 통해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될까.
치킨, K-푸드의 선봉에 서다
2025년 해외 한식 소비자 조사에서 한국식 치킨은 김치(9.5%)를 제치고 당당히 최선호 한식 메뉴 1위(14%)에 올랐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튀김옷과 달콤짭짤한 양념의 조화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의 소울푸드가 되기에 충분했다. ‘치맥(치킨+맥주)’이라는 신조어가 보통명사처럼 쓰일 만큼, 치킨은 현대 한국 식문화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하고 친숙한 아이콘이다.
정부는 바로 이 지점에서 K-미식 여정의 가능성을 보았다. 가장 대중적이고 사랑받는 메뉴를 선봉에 내세워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지역으로 이끌겠다는 전략이다. K-치킨벨트는 프랜차이즈 치킨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국 닭 요리의 무한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플랫폼에 이름을 올린 30개의 명소는 저마다의 개성과 역사를 자랑한다.
대구 평화시장의 명물인 닭똥집 튀김 골목의 고소함, 강원도 태백의 얼큰하고 진한 국물이 일품인 물닭갈비, 전남 해남에서 맛보는 다채로운 닭 코스요리, 안동의 짭짤하고 달콤한 간장 소스가 밴 찜닭, 속초 중앙시장의 명물 닭강정, 그리고 영화의 인기로 탄생한 수원 왕갈비치킨까지. 이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이는 치킨이 단순히 ‘튀긴 닭’이 아니라, 각 지역의 식재료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든 고유한 ‘요리’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단순한 맛집 지도를 넘어, 참여로 완성되는 미식 플랫폼
‘K-치킨벨트 플랫폼’이 기존의 관광 지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참여’와 ‘연결’이라는 키워드에 있다. 이 플랫폼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한 맛집 리스트가 아니다. 지난 3월부터 4월까지 진행된 ‘대국민 나만의 치킨·닭요리 성지 공모 이벤트’를 통해 무려 2,700여 건의 아이디어가 접수되었고,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의 추천과 현장 검증이 더해져 최종 30곳이 선정됐다. 공급자가 아닌, 그 지역의 진짜 매력을 아는 여행객과 주민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돋보인다.
플랫폼의 기능은 더욱 입체적이다. 단순히 맛집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그곳을 중심으로 한 최적의 여행 코스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춘천 닭갈비 1박 2일 여행 코스’를 살펴보자. 첫날 은행나무마을에서 고구마 캐기 체험을 하고, 신북 닭갈비거리에서 식사를 즐긴 후 삼악호수스카이워크의 아찔한 풍경을 감상한다. 다음 날에는 지역 양조장에서 전통주 만들기 체험을 하고, 고즈넉한 청평사와 활기 넘치는 춘천 낭만시장을 둘러보는 식이다.
이는 음식을 단순한 목적지가 아닌, 지역의 자연과 문화, 사람을 연결하는 ‘허브’로 기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더 나아가 이용자가 직접 자신만의 추천 여행 코스를 만들어 공유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나의 특별한 미식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여행의 영감을 주는,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플랫폼으로의 발전을 꿈꾸는 것이다. 한식진흥원 누리집과 네이버 지도 링크를 통해 누구나 이 즐거운 여정에 동참할 수 있다.
페어링의 미학, 치킨에서 전통주와 명인의 손맛으로
K-미식 여정은 치킨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치킨은 맛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역할이다.
농식품부가 발표한 하반기 로드맵은 치킨을 시작으로 우리술, 전통식품, 대형 축제로 이어지는 거대한 ‘미식 릴레이’를 예고한다.
7월 K-치킨벨트 방문 이벤트로 포문을 연 뒤, 8월에는 전국의 ‘찾아가는 양조장’ 투어 코스가 기다린다. 이는 최근 미식계의 화두인 ‘페어링’의 중요성을 정확히 짚은 기획이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이 방송인 홍석천과의 좌담회에서 언급했듯, “찜요리는 향이 깊은 증류주와 어울리고, 닭갈비는 막걸리와 어울리는 등 미식 자원을 페어링해서 다른 자원과 연결”하는 경험은 미식의 즐거움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양조장에서 우리술의 역사와 가치를 배우고, 직접 술을 빚고 시음하며 내가 맛볼 닭요리와 가장 어울리는 한 잔을 상상하는 것. 이보다 더 감각적인 여행이 있을까.
9월에는 ‘대한민국식품명인과 함께하는 미식 투어’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수십 년간 한 길을 걸어온 명인과 함께 전통 장류나 김치를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은 음식에 담긴 철학과 시간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맛보는 것을 넘어, 우리 식문화의 뿌리를 깊이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여행에 인문학적 깊이를 더한다. 치킨이라는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시작해 전통주와 명인의 손맛이라는 우리 식문화의 정수까지, K-미식 여정은 맛의 스펙트럼을 점차 넓혀간다.
가을, 미식의 축제가 펼쳐진다
K-미식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가을에 집중되어 있다. 10월부터 11월까지, 국내외 소비자, 관광객, 바이어가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글로벌 식품 축제 ‘K-푸드 페스타’가 대대적으로 열린다. 이 기간 동안 서울은 거대한 미식의 놀이터로 변신한다.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식 페스타’는 유명 셰프들이 선보이는 한식 메뉴와 흥미로운 음식 이야기를 통해 한식의 문화적 가치를 조명한다. 11월 초 코엑스에서 열리는 ‘푸드위크코리아’에서는 프리미엄 식품부터 푸드테크까지, 식품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우리술 대축제’에서는 전국 각지의 다채로운 전통주를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떡볶이, 순대 등 K-스트리트푸드와 함께 즐기는 흥겨운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대미를 장식하는 ‘김치 페스티벌’은 배추 수확부터 김치 담그기, 시식까지 김장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이처럼 다채롭게 펼쳐지는 축제들은 K-미식 여정이 단순히 개인의 여행을 넘어, 모두가 함께 즐기고 교류하는 문화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의 숨결을 불어넣는 미식 관광의 미래
‘K-미식 여정’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지속 가능한 관광 생태계’ 구축이다. 그동안 한국 관광은 서울과 일부 대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전국 곳곳에 숨어있다. K-치킨벨트는 바로 그 숨겨진 미식 자원을 발굴해 관광객의 발길을 지방 소도시와 농촌으로 유도하는 강력한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다.
방송인 홍석천이 제안한 “시골 마을회관을 활용해 어머니들의 손맛을 알리자”는 아이디어는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프랜차이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 지역 어머니들의 손맛이 담긴 진짜 로컬 푸드야말로 가장 강력한 관광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마을회관이 작은 레스토랑이 되고, 그곳에서 만든 김치와 전통주가 치킨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이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그 지역의 삶을 공유하는 따뜻한 경험이 될 것이다.
결국 K-미식 여정은 맛을 매개로 사람과 공간, 그리고 이야기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다. 치킨 한 조각을 맛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그 지역의 전통시장을 거닐고, 작은 양조장에서 장인의 열정을 만나고, 농촌의 풍요로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먹기 위해 떠난 여행이 지역의 다양한 자원을 경험하고,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과정으로 확장되는 것. 이것이 바로 K-미식 여정이 꿈꾸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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