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궁중과 사찰은 왜 상추로 떡을 빚었을까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5-13 20:47:13

여름의 기운을 담아낸 절기 음식, 와거병(萵苣餠) [사진=서진영기자 / 사찰 방식으로 만든 와거병]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초여름이 시작되면 상추는 흔해진다. 오늘날 우리에게 상추는 삼겹살 곁에 놓이는 쌈채소에 가깝지만, 조선의 여름 밥상에서 상추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 식재료였다. 더위로 흐트러진 몸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갈증을 덜어주는 채소로 여겨졌고, 때로는 떡이 되어 궁중의 병과상과 사찰의 공양상에 함께 올랐다. 와거병(萵苣餠), 오늘날 흔히 ‘상추시루떡’ 혹은 ‘상추떡’이라 불리는 떡 이야기다.

[사진=망미장터 /조선상추]

와거병의 ‘와거(萵苣)’는 상추를 뜻하는 한자어다. 이름 그대로 상추를 넣어 만든 떡이라는 의미다. 지금은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근대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와거병이 기록되어 있다. 멥쌀가루에 상추를 섞고 거피팥고물을 켜켜이 안쳐 시루에 찌는 방식의 떡이다. 현재 확인되는 기록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인 사례는 1920년대 문헌에서 나타나지만, 음식 자체의 형성 시기는 그보다 이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조선의 떡 문화는 오랜 생활 속 전승을 거친 뒤 뒤늦게 문헌화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 후기의 《규합총서》, 《시의전서》 등에는 계절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증병(蒸餠) 계열 떡이 등장한다. 떡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절기와 몸 상태를 고려한 음식 문화의 일부였고, 여름철에는 수분이 많고 성질이 부드러운 재료들이 자주 사용됐다. 와거병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형성된 여름철 떡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추가 떡의 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다소 낯설다. 하지만 조선시대 상추는 단순 곁채소가 아니었다. 《임원경제지》 등 조선 후기 생활·농업 문헌에서는 상추를 중요한 여름 채소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으며, 몸의 열을 누그러뜨리는 식재료로 인식했던 흔적도 확인된다. 조선의 음식 문화는 단순히 차갑고 뜨거운 온도의 개념보다 음식이 가진 성질과 계절의 흐름을 함께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와거병 역시 더위가 시작되는 계절, 몸을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한 떡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떡이 궁중과 사찰이라는 서로 다른 음식 문화 안에서 모두 이어졌다는 점이다.

[사진=궁중음식연구원/ 와거병]

궁중에서 와거병은 절제된 미감을 담은 병과였다. 흔히 궁중음식이라고 하면 화려한 고임상과 값비싼 재료를 떠올리지만, 실제 궁중 병과는 계절의 흐름과 색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와거병은 흰 멥쌀가루와 거피팥고물 사이로 잘게 썬 초록빛 상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화려한 색은 아니지만, 여름의 기운을 담은 단아한 대비가 특징이다. 가장 흔한 채소 가운데 하나였던 상추를 병과로 끌어올린 방식에는 궁중 소주방의 섬세한 감각이 담겨 있다.

사찰에서의 와거병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사찰 음식은 자극을 줄이고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육류와 오신채를 배제한 대신 계절 채소와 곡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상추는 향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수분감과 청량감을 지닌 채소였기에 수행 음식과 잘 어울렸다. 특히 여름철 억세진 상추잎까지 버리지 않고 떡으로 활용한 방식에서는 재료를 끝까지 살려내려 했던 사찰의 음식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궁중의 와거병이 계절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음식에 가까웠다면, 사찰의 와거병은 몸의 흐름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음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두 음식 문화는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가장 흔한 제철 식재료 속에서도 계절의 기운과 몸의 균형을 읽어내려 했다는 점이다.

와거병의 맛은 예상보다 조용하다. 떡을 입에 넣으면 먼저 멥쌀 특유의 담백함이 느껴지고, 씹을수록 상추의 풋향이 짧게 스친다. 쑥떡처럼 향이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방식이 아니라 곡물 사이로 여름 채소의 기운이 은은하게 번지는 느낌에 가깝다. 켜 사이에 들어간 거피팥고물은 텁텁하기보다 가볍고 맑은 단맛을 더한다.

식감 역시 특징적이다. 상추는 찌는 과정에서 수분을 내며 멥쌀가루 사이에 스며드는데, 이로 인해 떡의 조직감이 한층 부드럽고 촉촉하게 변한다. 거친 풀향은 열기 속에서 한결 부드러워지고, 여름 채소 특유의 맑은 향만 은은하게 남는다. 상추는 단순히 색을 내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여름 떡의 질감과 균형을 조절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던 셈이다.

전통 방식의 와거병은 비교적 단순한 재료로 만든다. 어린 상추잎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한 뒤 잘게 썰어 멥쌀가루와 섞고, 시루에 거피팥고물을 켜켜이 안쳐 찌는 방식이다. 지역과 전승에 따라 찹쌀을 일부 섞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담백한 멥쌀 시루떡 구조에 가깝다. 화려한 고명이나 강한 양념 대신 곡물과 채소가 가진 본래의 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완성된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와거병은 오히려 꽤 현대적인 음식처럼 느껴진다. 자극적인 단맛보다 재료 본연의 풍미를 중시하고, 식물성 재료 중심으로 구성되며, 계절 식재료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사찰 디저트와 비건 한식 디저트 흐름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와거병은 조상들의 음식 감각을 보여주는 떡이다. 더운 계절이라고 해서 무조건 차갑고 강한 음식으로 몸을 식히려 한 것이 아니라, 제철 식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부담 없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상추 한 장조차 계절의 기운을 담은 음식으로 바라봤던 시선, 그리고 흔한 채소를 떡으로 빚어내며 몸의 균형까지 고민했던 감각. 와거병에는 화려함보다 조화를 먼저 생각했던 조선 음식 문화의 조용한 지혜가 담겨 있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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