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연의 리듬을 담은 ‘절기 음식’에서 한국 밥상의 미래를 찾다"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09-27 12:00:43
[Cook&Chef = 이경엽 기자]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 우리는 역설적으로 밥상의 근본을 잃어가고 있다. 평생을 김치와 전통 음식 연구에 헌신해온 김정숙 전남과학대 명예교수는『열두 달 세시풍속과 절기음식』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자연의 순리’를 다시금 화두로 던진다. 이 책은 단순한 조리법의 나열이 아닌,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뿌리를 더듬어보는 깊은 성찰의 결과물이다. 쿡앤셰프가 김 교수를 만나 그의 음식 철학과 우리 밥상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천년의 음식 문화, 누군가는 가르쳐야 했다"
김 교수가 우리 전통 음식, 특히 김치 연구라는 외길에 들어선 계기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어느 날 김치 공장을 견학하게 된 그는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60대를 훌쩍 넘긴 어르신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분들이 떠나고 나면 외국인들을 데려와 김치를 만들어야겠구나 싶더군요. 천년의 음식 문화인데, 누구도 일상의 어머니 같은 수더분한 음식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김치 종주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김치와 발효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대학조차 없던 현실을 마주한 그는, 수많은 어려움 끝에 전남과학대학교에 ‘김치발효학과’를 설립했다. 그에게 김치와 발효음식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음식”이자 한국인 밥상의 흔들리지 않는 핵심이었다.
유년의 밥상, 맛의 뿌리가 되다
김 교수의 음식 철학은 유년 시절의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남도의 대가족 안에서 홍어, 낙지, 굴, 매생이 등 사시사철 다채로운 제철 음식을 맛보며 자랐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 그의 밥상은 자연의 달력 그 자체였다.
그는 겨울철 꼬막에 얽힌 기억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장날이면 잔치가 없어도 꼬막을 큼직한 자루로 사 오셨어요. 삶은 꼬막을 양푼에 수북이 담아두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경쟁하듯 숟가락으로 까먹었죠”.
손님이 와도 커피나 차 대신 꼬막을 대접할 만큼 흔하고 귀한 음식이었다. 먹고 남은 꼬막은 꼬막회, 비빔밥, 전, 무침, 간장조림 등 무궁무진하게 변주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한 가지 식재료도 다양한 요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리를 전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세계인의 식탁을 향한 제언, K-푸드의 확장
한류와 함께 K-푸드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지금, 김 교수는 절기 음식이 가진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본다. 그는 해외 셰프들이 특히 한국의 장류 소스에 큰 관심을 보인다며, 기존의 고추장, 된장을 넘어 초고추장처럼 묽게 만들거나 풋고추를 갈아 넣은 ‘녹색 고추장’과 같이 현대적으로 변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청포묵, 도토리묵처럼 한국에만 있는 ‘묵’ 종류는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으로 소개할 수 있으며, 기존 한식 메뉴의 조리법과 소스, 담음새를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각 음식에 담긴 건강, 다이어트 효과는 물론, 한국 고유의 정서를 함께 담아 전달해야 합니다”.
셰프들에게 영감을, 외식 문화의 새로운 길
절기 음식의 지혜는 현대 외식 문화를 이끄는 셰프와 외식업 종사자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는 뉴욕 맨해튼에서 성공한 한식 레스토랑들이 전통 한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계절별로 메뉴를 바꾸는 점을 성공 사례로 꼽았다.
김 교수는 떡산적, 라이스페이퍼를 활용한 밀전병 잡채말이, 오이선 같은 전통 메뉴의 현대적 변용과 함께, 단호박, 흑임자, 고구마 등을 활용한 건강 수프, 석류즙과 배를 이용한 화채 등 새로운 메뉴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우리 시절 음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있는 문화로의 계승을 위한 과제
이 모든 지혜가 박물관 속 유물이 되지 않기 위해 김 교수는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남녀 구분 없이 조리 수업을 필수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요리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식량권 존중, 국민 건강 증진, 지역 문화 계승, 협동심과 창의력 향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조리법을 모르는 세대는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음식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결국 개인과 국가 전체의 건강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독자들이 지금 당장 부엌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첫걸음을 제안했다.
“재래시장에 가서 그날 가장 흔하고 저렴한 채소나 생선을 구매하세요. 그것이 바로 최고의 제철 식품입니다. 그리고 간장, 액젓, 고추장, 된장을 활용해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해보세요. 조리법에 정답은 없습니다.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도전하는 즐거움 속에서 우리 밥상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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