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종가의 시간이 빚어낸 한 잔의 풍류, 안동 농암종택 ‘일엽편주’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6-05-30 13:54:47

잔에 담긴 종가의 숨결, 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른 오백 년의 향기 사진 = 이경엽 기자

[Cook&Chef = 이경엽 기자] 행사 중간,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안동 농암종택의 이원정 종부가 무대 중앙에 마련된 시연 자리에서 직접 준비해 온 술지게미를 짜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종부의 오랜 세월이 깃든 손길을 거쳐 뽀얀 탁주가 거름망을 통과해 떨어지자, 곧이어 장내에는 일엽편주의 고소하고 알싸한 향이 뭉게뭉게 퍼졌다.

이윽고 참석자들의 잔마다 갓 걸러낸 신선한 탁주가 채워졌다. 조심스레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자, 맛은 달달하고 부드럽다. 혀끝을 감도는 묵직하면서도 기분 좋은 단맛 뒤로, 기품 있는 과실 향과 꽃 향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판되는 일반적인 막걸리와는 확연히 궤를 달리하는, 도수 12도의 이 깊고 진한 탁주 한 잔에는 안동 농암종택이 500년 넘게 묵묵히 이어온 가양주(家釀酒)의 철학과 종부의 피땀 어린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토록 벅찬 감동을 선사한 시음 체험은 지난 5월 28일, 한식진흥원 지하 한식문화공간 이음에서 열린 ‘5월 한식콘서트’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행사는 안동 농암종택의 17대 이성원 종손과 이원정 종부, 그리고 행사의 진행을 맡은 김태희 술문화해설사(안동 전통주 강사)가 참석한 가운데 ‘농암종택 전통주 일엽편주’를 주제로 약 100분에 걸쳐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농암종택의 전경과 종부의 술 빚는 영상으로 문을 연 콘서트는, 단순한 술 이야기를 넘어 오랜 시간 선비의 삶과 종가의 전통을 지켜온 하나의 거대한 문화유산을 탐구하는 자리였다.

종손의 결의: "상행위를 넘어 사케를 극복하다"

행사의 본격적인 막이 오르며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성원 종손은 종가 특유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로 첫인사를 건넸다. 그는 "안동 말로 자기 집안 자랑을 하는 것은 가장 상놈이 하는 짓"이라며, 퇴계 종손 역시 생전에 단 한 번도 밖에서 퇴계 선생의 말씀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일화를 꺼내놓았다. 이처럼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종손 내외가 평창동 등 외부 행사에 나서지 않던 원칙을 깨고 무려 6년 만에 대중 앞에 선 이유는 명확했다. 전임 장관 출신인 이희범 한국정신문화재단 대표이사의 간곡한 권유와 더불어, 무엇보다 '한국의 전통술을 세상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사명감이 이들의 발걸음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성원 종손은 일엽편주를 공식적으로 허가받고 상품화할 당시 스스로 세웠던 원대한 목표를 대중 앞에 고백했다. 그는 "단순한 상행위로 끝나서는 안 되며, 맛은 물론이고 제품의 라벨과 병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의 사케를 극복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내비쳤다. 이러한 종손의 굳은 의지는 시장의 반응으로 곧바로 증명되었다. 출시 직후 서울의 유명 전통주 전문점인 ‘백곰막걸리’에서부터 납품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오는 5월 30일로 출시 6주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 매번 ‘완판’ 행진을 기록하며 전통주 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 일엽편주가 싱가포르의 미슐랭 3스타 최고급 식당에 매달 40~50병씩 고정적으로 수출되며 홍콩 등지 해외 미식가들의 입맛까지 완벽하게 사로잡고 있다는 점이다. 종손은 "음식 문화의 끝판왕은 결국 술"이라고 짚으며, 명품 술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문화 탑을 온전히 쌓아 올릴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덧붙였다. 

사진 = 이경엽 기자

퇴계 이황의 친필과 유상곡수, '일엽편주'라는 이름의 연원

이처럼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엽편주(一葉片舟)의 이름과 디자인에는 500년 전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연원이 숨 쉬고 있다. 김태희 술문화해설사가 단아하면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네이밍과 라벨 디자인에 얽힌 사연을 묻자, 종손은 2020년 첫 시판 당시 엄숙했던 종택의 풍경을 묘사했다. 일엽편주를 세상에 처음 내놓던 날, 이들은 기관장이나 내빈을 초청해 거창한 행사를 여는 대신 종택의 사당에 모여 조상에게 먼저 '고유(告由)'를 올렸다. 조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낭독된 이 고유문에는 '가양주조 양동댁(양동마을에서 시집온 종부 이원정)'이라는 문구가 명확히 적혀 있어, 가문의 며느리에 대한 깊은 존중과 감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특히 일엽편주의 병 라벨에 새겨진 유려한 한자 글씨는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도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을 집자한 것이다. 종손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 농암 이현보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 등은 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분강)에서 굽이치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불리던 노래가 너무 단조롭고 잠이 오자, 퇴계 선생의 제안으로 농암 선생이 전해 내려오던 '어부가'를 개작하여 장가 9장은 읊는 곡으로, 장가 5장은 창(노래)으로 재편성하는 예술적 혁신을 단행했다. 1548년 9월, 퇴계 선생을 비롯해 온계 선생, 그리고 농암 선생의 아들 등 당대의 고위 관직자(충청감사, 풍기부사 등)들이 한데 모여 이 어부가를 부르며 취하고 춤을 추었다는 생생한 기록이 퇴계 선생의 발문에 남아있다. 근엄한 도학자들마저 춤추게 했던 이 어부가 5장의 "일엽편주 만경창파에 띄워두고"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것이 바로 현재의 '일엽편주'다. 이성원 종손은 이처럼 500년 전 선비들이 모여 음악과 춤, 술을 즐겼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한류'의 진정한 시발점이자 한국 문화의 정수라고 평가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평균 수명 86세, 종가의 놀라운 '장수' 비결

농암 가문과 전통주가 맺어온 이 유기적 관계는 가문의 경이로운 '장수(長壽)' 기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500년 전 조선시대의 평균 연령이 극히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농암 선생은 89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며 그의 아버지는 98세, 어머니는 85세, 조부는 84세, 고조부는 84세를 살았다. 동생들 역시 91세와 76세까지 생존했고, 농암 선생의 아들 육 형제 또한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70~80대의 장수를 누렸다. 종손은 과거 안동대학교 권영준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며, 당시 농암 가문의 평균 연령이 무려 86세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종손은 이토록 기적에 가까운 장수를 가능케 한 배경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음식, 그리고 농암주와 퇴계집 등 기록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좋은 술'이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진 = 이경엽 기자

"술은 사람과 같다" 위기가 빚어낸 종부의 역작

이처럼 깊은 철학과 역사를 담은 일엽편주를 오늘날 실제 예술로 승화시키는 주인공은 40년 가까이 가양주를 빚어온 이원정 종부다. 종가로 시집온 이후 평생을 '봉제사 접빈객(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대접함)'에 헌신해 온 종부는, 시아버지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식객을 대접하기 위해 1년에 두 번은 반드시 큰 술을 빚어야 했다. 때로는 술이 모자라 술지게미에 찬물을 섞어 짜낸 옅은 막걸리마저도 손님들이 "맛있다"며 반겨주었던 기억이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흥미롭게도 일엽편주가 지금처럼 본격적인 상업 주조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 덕분이었다. 안동시의 요청과 한옥 보존의 필요성 때문에 종택을 개방하고 숙박객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던 종부는, 전염병 사태로 식사 제공이 전면 중단되자 온전한 여유 시간을 얻게 되었다. 이 시간을 활용해 과거 손님들이 칭찬해주었던 술맛을 떠올리며 본격적인 양조 연구에 몰두한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세간의 찬사를 받는 일엽편주다.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을 묻는 질문에 이원정 종부는 망설임 없이 "술은 사람과 똑같다"라는 묵직한 철학을 내놓았다. 종부는 술을 빚는 내내 갓난아기를 다루듯 효모의 상태를 살핀다. 아기가 우는지, 보채는지, 눈물이 나는지 매일 관찰하듯 온 정성을 쏟아야만 좋은 술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양조자의 성품이 술맛을 좌우한다고 굳게 믿는 그녀는, 화를 내거나 거칠게 술을 다루면 술 역시 사납게 변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차분하게 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다독거리면, 신기하게도 술에서 복숭아 향, 포도 향, 배 향 등 아름다운 과실 향이 풍성하게 피어오른다고 한다. "이번에는 발효 잘 돼야 한다, 알았지?"라며 매일 독에 대고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종부의 지극한 정성이야말로 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엽편주의 가장 큰 비법이었다. 

사계절을 담은 '꽃술'의 미학과 10월 발효의 비밀

일엽편주는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시계를 가장 민감하게 담아내는 술이기도 하다. 특히 1년에 단 두 번 소량만 생산되어 애주가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꽃술'의 제조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원정 종부는 매화가 처음 피어나는 3월 중순 무렵 첫 독을 안치는 것을 시작으로 기나긴 꽃술의 여정에 돌입한다. 이후 자두꽃, 살구꽃, 앵두꽃, 진달래, 목련, 복숭아꽃이 피어나는 순서대로 온 산천을 누비며 꽃을 채취한다. 봄꽃의 피날레는 야생 개복숭아꽃으로 장식되며, 가을이 오면 다시 국화를 채취해 12월 초에 국화주(국화 편주)를 완성해 낸다. 이처럼 길고 고된 인내의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일엽편주의 꽃술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대우받는다. 종부가 생각하는 일엽편주가 가장 맛있게 빚어지는 최적의 시기는 바로 10월이다. 맑고 청량한 공기, 적당히 따스한 가을 햇살과 바람이 누룩을 법제(건조 및 살균)하기에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며, 효모들 역시 이 시기의 기운을 가장 좋아해 실패 없이 깊고 풍부한 맛을 내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500년 종택의 적절한 가난, '북어 보푸라기'와의 시음

종부의 양조 철학과 사계절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장내에서는 다시 한번 생생한 시음이 이어졌다. 현장에서 종부가 직접 걸러낸 뽀얀 탁주와 함께 참석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또 다른 조연이 등장했는데, 바로 안동 전통의 술안주인 '북어 보푸라기'였다. 안동 지방의 제사에 빠지지 않는 간고등어와 함께 손님맞이용 안주로 활용되던 북어 보푸라기는 종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동 가난의 상징'이다. 비싼 고기를 올릴 형편은 안되지만, 양반의 예의와 염치를 다해 가장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내어놓은 '적절한 가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원정 종부는 과거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손으로 일일이 뜯어내던 방식에서 점차 발전하여, 최근에는 물을 살짝 튕겨 분쇄기에 가는 방식으로 촉촉하고 보슬보슬한 식감을 낸다고 비법을 전수했다. 소금으로만 깔끔하게 간을 하고 참기름을 듬뿍 넣어 깨끗하게 뭉쳐낸 북어 보푸라기는 묵직하고 달콤한 12도 탁주의 풍미를 완벽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사진 = 이경엽 기자

쏟아지는 찬사 속 확인한 한국 전통주의 담대한 비전

술기운이 장내를 부드럽게 덥히자 참석자들의 열띤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한 와인 전문가는 다채로운 과일 뉘앙스와 후추 같은 매콤한 향미가 느껴진다며 발효 과정을 물었고, 종부는 철저한 '온도 관리'와 맑은 날 평상에 누룩을 널어놓는 '365일 지극한 법제'를 비결로 꼽았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병 라벨 디자인에 대한 찬사도 이어졌다. 이성원 종손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며느리가 일본 사케 병들을 치밀하게 연구한 끝에 지금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완성해 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온라인 판매처에서 늘 품절이라 애가 탄다는 한 참석자의 말에, 이원정 종부는 즉석에서 농암종택 홈페이지의 휴대전화 번호로 문자를 남겨주면 다음 날 바로 택배를 보내주겠다는 넉넉한 인심을 보여 환호를 자아내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술을 맛본 후 "청량한 공기 속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와 비단옷을 입은 여성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라며 일엽편주의 우아함을 시적으로 극찬했다. 

두 시간에 걸친 밀도 높은 한식콘서트는 전통주의 밝은 미래를 다짐하는 내빈들의 발언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이희범 한국정신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과거 당파와 나이를 초월해 학문적 동지로 우정을 나누었던 퇴계 이황과 농암 이현보, 율곡 이이의 선비 정신을 언급하며 안동 정신문화의 뿌리를 짚었다. 그는 "중국의 마오타이나 일본의 사케가 세계 시장을 호령하듯, 일제강점기의 탄압을 이겨낸 우리의 가양주 문화 역시 일엽편주를 필두로 글로벌 명품 술로 거듭나야 한다"는 담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뒤이어 프랑스 한국문화원장 시절을 회고한 전해웅 한식진흥원 사무총장은 "아무리 음식이 훌륭해도 제대로 된 술이 페어링 되지 않으면 진정한 미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강조하며, 술을 아이처럼 대화하며 빚어내는 종부의 정성 속에서 서양 양조 방식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한국 고유의 힘과 감동을 발견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농암종택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기나긴 인내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종부의 정성 어린 손끝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일엽편주. 그 맑고 깊은 한 잔의 술은 단순한 취기를 뛰어넘어, 500년 전 낙동강 물굽이를 따라 유유히 흘렀던 선비들의 낭만과 자긍심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주는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문화의 결정체였다.

Cook&Chef /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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