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생활 건강노트] 매운맛의 힘, 고추가 몸을 바꾸는 방식

송자은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5-12-22 16:56:13

혈당·체중·혈관까지, 작은 열매가 만드는 대사 변화
‘독’에서 ‘약’으로 재해석되는 고추의 과학
사진 = 픽사베이

[Cook&Chef = 송자은 전문기자] 매운맛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상징이었다. 매운 청양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모습은 한국인의 식탁에서만 볼 수 있다. 우리에겐 흔하고 친숙한 채소이지만 최근 고추를 둘러싼 연구들은 이 작은 채소가 단순한 반찬을 넘어, 인체 대사와 건강 전반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혈당 관리, 체중 조절, 심혈관 건강을 중심으로 한 고추의 생리적 작용은 ‘메디컬 푸드’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고추의 핵심은 매운맛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매운맛을 만들어내는 성분과 인체의 반응이다. 통증에 가까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순간, 몸은 방어와 회복을 동시에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고추는 단순한 자극제가 아닌, 대사를 깨우는 신호로 작동한다.

혈당 조절의 열쇠, 고추 속 생리활성 물질

최근 주목받는 고추의 기능은 혈당 반응을 완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추에는 탄수화물의 분해와 흡수 속도를 늦추는 데 관여하는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은 소장에서 당이 급격히 흡수되는 것을 억제해 식후 혈당 상승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일부 품종에서는 이 작용이 의약품의 기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관찰되며, 식재료 기반 혈당 관리에 대한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이는 곧 ‘당을 낮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혈당의 급격한 변동을 막는 것은 인슐린 부담을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대사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고추가 혈당 관리 식단에서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성분을 농축한 건강기능식품뿐 아니라, 일상 식사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캡사이신, 통증을 넘어 온 몸을 보살핀다

고추의 매운맛을 담당하는 캡사이신은 흔히 자극적인 성분으로만 인식되지만, 인체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캡사이신이 체내에 들어오면 신경계는 이를 통증 신호로 받아들이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엔도르핀과 같은 물질을 분비한다. 이 과정에서 혈류가 증가하고, 에너지 소비가 일시적으로 높아진다.

이러한 반응은 신진대사 활성화로 이어진다. 체온이 상승하고 열 발생이 늘어나면서 지방 연소가 촉진되는 것이다. 실제로 고추 섭취가 에너지 소비량을 증가시키고, 체지방 축적을 억제하는 데 기여한다는 연구들이 축적되고 있다. 고추가 다이어트 식단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식욕을 억누르기보다는 몸이 에너지를 쓰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고추의 효능은 대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캡사이신과 다양한 항산화 성분은 혈관 기능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고추를 규칙적으로 섭취하는 사람들에게서 심혈관 질환 위험이 낮게 나타난다는 대규모 관찰 연구들은, 매운맛이 혈액순환과 염증 조절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혈관이 확장되고 혈류가 원활해지는 과정은 심장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에 항산화 작용이 더해지면서, 산화 스트레스로 인한 혈관 손상 가능성도 낮아진다. 물론 이는 고추만으로 건강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식단 속에서 고추가 차지하는 위치를 재평가할 충분한 근거는 된다.

씨앗까지 버릴 이유 없는 채소

고추를 손질할 때 흔히 제거되는 고추씨 역시 주목할 만하다. 고추씨에는 캡사이신을 비롯해 항산화 성분과 플라보노이드가 농축돼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고추씨 추출물이 염증 반응을 완화하고, 신경세포 보호와 관련된 작용을 보였다는 결과도 보고됐다. 식재료의 ‘부산물’로 여겨졌던 부분이 기능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고추는 한국 식문화에서 단순한 채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발효, 조리, 조합을 통해 매운맛을 조절하고 흡수 방식을 바꿔온 경험은, 고추를 자극적인 식품이 아닌 균형 잡힌 재료로 자리 잡게 했다. 생으로 먹든, 발효된 형태로 섭취하든, 고추는 늘 다른 재료와 어울리며 식사의 중심을 잡아왔다.

중요한 것은 양과 방식이다. 과도한 섭취는 위장 자극이나 불편을 유발할 수 있지만, 적절한 양을 식사에 곁들이는 것은 오히려 대사 리듬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매운맛에 따르는 몸의 반응을 이해하며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작은 열매 하나가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식재료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고추는 더 이상 단순히 맵기만 한 채소가 아니다. 일상의 식탁에서 가장 쉽게 만나는 기능성 식재료 중 하나로, 그 가치는 지금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Cook&Chef / 송자은 전문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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