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 시인, 크레용으로 그리는 시 ‘내게로 온 시간’ 개인전 오픈

임요희

cooknchefnews@naver.com | 2022-09-13 08:17:37

- 나이 쉰을 넘겨 처음으로 잡아본 크레용
- 시와 그림은 근본적으로 성격 같아
- 나를 찾아온 모든 시간에게 감사하는 마음

[Cook&Chef=임요희 기자] 문단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화단으로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정병근 시인의 첫 개인전이 열린다. 9월 14일부터 20일까지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에서 진행하는 ‘내게로 온 시간’이 그것이다. 정병근은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 등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 시인으로 사물을 대하는 주체의 시선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실존주의적인 시를 주로 써왔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그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나
쉰이 넘도록 한 번도 붓을 잡아본 적이 없다. 그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서 전시회에 자주 다니긴 했지만 화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같은 동네에 사는 작가들과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데 시와 그림을 겸업하는 선배 시인이 살 게 있다며 문구점에 들렀다. 그날 그가 후배 작가들에게 36색 크레용(오일파스텔)을 선물로 사주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때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잡아본 크레용이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한 번 그려본 것을 단체 채팅방에 올렸더니 다들 잘 그렸다고 격려해주었다. 한 점, 두 점 그리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나중에는 밤을 샐 정도로 그림에 열중하게 되었다. 나도 나에게 이런 열정이 있다는 데 놀랐다.

시와 그림은 어떤 관계가 있나
‘이미지’를 표현되기 이전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을 포착하고 선택하여 작품으로 재현한다는 면에서 시와 그림은 한 몸이다. 시는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그림은 붓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게 다를 뿐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과정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모든 예술이 그렇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을 다른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정병근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문학도 그렇지만 내가 예술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현’에 대한 욕심이다. 내 안의 이미지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현될 때 나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그 순수한 기쁨이 내 작업의 근본 에너지다. ‘촉과 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대상에 대한 선지식을 배제하고 순수한 현상 그 자체를 보려고 한다. 같은 장면일지라도 감지하는 ‘촉’과 보는 ‘각’에 따라 다른 그림이 된다. 나는 촉과 각을 잃지 않기 위해 역발상의 태도를 유지하고 낯설게 보려고 한다. 내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이 그것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나는 그에 만족한다. 반추상, 추상에도 관심이 있지만 하지만 끝을 본다고 할까. 당분간은 추상화의 유혹을 누르고 원근법과 서정성, 동일성에 기반을 둔 구상화에 좀 더 매진할 생각이다.


크레용은 어떤 재료인가
크레용(오일파스텔)은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재료다. 세밀한 묘사가 불가능하고 덧칠이 어려워서 원하는 색을 내기 어렵다. 그러나 오일파스텔만이 가지는 특유의 질감이 있다. 크레용은 내가 처음 접한 재료면서 극복하고 싶은 재료이고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재료다. 크레용의 매력에 빠지면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더 극복할 일이 많은 만큼 더 친해질 생각이다. 

좋아하는 화가가 있다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마티스, 샤갈, 모네를 좋아한다. 특히, 마티스의 강렬한 색과 사랑스러운 디테일에 매료되곤 한다. 현대 작가로는 에드워드 호퍼와 데이비드 호크니를 좋아한다. 햇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적막감을 낭비 없이 응시하는 도시적 고독이 좋다.


만물은 빛과 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모두 내 것일 수는 없다. 내가 선택하고 감각하는 그 순간만이 나에게 특별하다. 내게로 온 시간은 기억에 새겨지고 반짝이다가 나와 함께 사라진다. 수많은 시간을 갈아탄 끝에 나는 걷고 멈추면서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내게로 와준 모든 특별한 시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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