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맛은 송편에서 오고, 송편 맛은 솔내에서 온다.”

이경엽 기자

cooknchefnews@hnf.or.kr | 2025-10-05 12:00:39

[추석특집 2편] 송편, 반달에 소망을 빚다...한가위 대표 음식에 담긴 이야기 이미지 생성: ChatGPT (OpenAI) 제공 / Cook&Chef 제작

[Cook&Chef = 이경엽 기자] 시인 백석은 그의 시 「고야(古夜)」에서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고 노래했다. 추석 전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마다의 솜씨로 송편을 빚는 풍경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따뜻한 기억이다.

은은한 솔향과 함께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쫀득한 떡 사이로 달콤한 소가 흘러나오는 송편은 가을의 첫맛이자 추석을 상징하는 절대적인 음식이다. 햅쌀가루를 익반죽해 소를 넣고 빚어내는 이 작은 떡 하나에는 단순한 맛을 넘어, 소원 성취의 기원과 조상과 자손을 잇는 염원, 그리고 각 지역의 개성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왜 추석에는 둥근 보름달이 아닌 반달 모양의 떡을 빚었을까?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기 전, 그 반달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먼저 맛본다.

희망의 모양, 왜 보름달이 아닌 ‘반달’일까?

한가위의 상징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둥근 보름달임에도 불구하고, 송편을 반달 모양으로 빚는 데에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철학과 흥미로운 유래가 전해진다. 김정숙 전남과학대학교 명예교수의 저서 『열두 달 세시풍속과 절기음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의자왕 시절의 일화를 그 기원으로 소개한다.

어느 날 의자왕이 궁궐 땅속에서 나온 거북을 발견했는데, 그 등에는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라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왕이 당대의 유명한 점술가를 불러 해몽을 청하자, 그는 “둥근 달은 이미 가득 찼으니 이제 기울 일만 남았고, 초승달은 앞으로 점점 차오를 것이니 신라는 머지않아 흥하게 될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에 격노한 왕은 점술가의 목을 베었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는 그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백제는 멸망하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득 찬 완성(보름달)’은 곧 쇠락의 시작이며, ‘채워나갈 공간이 있는 미완성(반달)’이야말로 희망과 발전, 성장의 상징이라 여기게 되었다. 즉, 송편의 반달 모양에는 앞으로의 삶이 더 나아지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송편을 빚는 행위는 단순히 떡을 만드는 것을 넘어, 가족의 미래와 안녕에 대한 소망을 빚어내는 아름다운 의례였던 셈이다.

솔잎의 지혜: 맛과 멋, 그리고 과학의 조화

송편(松편)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솔잎을 이용해 찌는 떡’이라는 뜻이다. 떡을 찔 때 시루 바닥과 떡 사이에 솔잎을 켜켜이 깔아주는 것은 단순히 향을 더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놀라운 과학적 지혜와 미학이 숨어있다.

첫째,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하는 천연 분리대 역할을 한다. 둘째, 솔잎의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뜨거운 김과 함께 떡에 배어들어 햅쌀의 풍미를 한층 더 높여주고, 떡 표면에 자연스러운 무늬를 새겨 먹는 즐거움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까지 더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솔잎에 다량 함유된 피톤치드(phytoncide) 성분이다. 이 강력한 천연 항균 물질은 떡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해, 음식이 귀하고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조금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갓 쪄낸 송편에서 풍기는 상쾌한 솔향은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음식을 아끼고 보존하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로운 숨결인 셈이다.

차례상에 올리는 송편은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흰 쌀로만 빚은 흰 송편과 쑥 등을 넣어 만든 푸른 송편을 함께 올렸는데, 이는 해가 지는 서쪽(흰색)을 상징하는 조상과 해가 뜨는 동쪽(푸른색)을 상징하는 자손이 한자리에서 만나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것을 뜻했다. 작은 떡 하나에 세대를 잇는 경건한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이야기를 품은 팔도의 다채로운 송편 기행

송편은 지역의 특산물과 기질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 소를 자랑하는 ‘지역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서울·경기: ‘서울 깍쟁이’라는 말처럼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작고 앙증맞은 크기로 빚는 것이 특징이다. 모양이 단정하고 예뻐야 맛도 좋다는 멋과 격식을 중시했다. 깨나 꿀, 팥 등 단 맛의 소를 주로 사용했다.

강원도: 쌀이 귀했던 척박한 산간 지역의 특성을 살려 감자나 도토리 가루를 이용한 투박하면서도 구수한 송편을 만들었다. 특히 감자 전분으로 빚은 감자 송편은 익으면 속이 투명하게 비치고, 씹을 때의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전라도: 예로부터 풍류와 멋, 풍요로운 식문화의 고장답게 송편도 화려하다. 초록빛 모시잎을 쌀가루에 섞어 특유의 향과 쫄깃함을 더한 모시잎 송편이 유명하며, 손으로 일일이 모양을 내 빚은 꽃송편(매화송편)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워 예술 작품에 가깝다.

충청도: 호박을 썰어 말린 호박고지를 꿀에 버무려 소로 넣거나, 아예 늙은 호박을 쌀가루에 섞어 고운 노란 빛깔을 낸 호박송편이 유명하다. 인공적이지 않은 은은한 단맛이 특징으로, 소박하고 순박한 지역의 인심을 닮았다.

평안도: 바닷가 지역에서는 모시조개 모양을 본떠 큼지막하게 빚는 조개송편을 만들었다. 조개가 많이 잡히기를 바라는 어민들의 소박한 기원이 담겨 있으며, 넉넉한 크기만큼이나 푸짐한 인심을 자랑한다.

제주도: 화산섬이라는 독특한 환경답게 송편 역시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송편을 둥글납작한 비행접시 모양으로 빚는 것이 특징이다. 보름달처럼 둥글게 빚어 가운데를 살짝 누른 형태로, 완두콩이나 팥을 소로 주로 사용한다.

이처럼 다채로운 송편의 모습은 각 지역의 삶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예쁜 아이를 낳는다"는 속설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정성을 다해 떡을 빚는 과정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미덕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옥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니 반달이 둥글게 떠오르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올 추석에는 송편 한 점에 담긴 이야기와 함께 가을의 풍요를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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