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길을 가도 버틴 '천리장'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 2026-07-07 16:47:01

[한식탐구] 윤왕순 명인의 전통 장
익은 장을 졸이고, 한우의 감칠맛을 더해
더운 여름철 저장성과 풍미를 높인 별미
천리장(千里醬)의 이름에는 천 리 길을 들고 가도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진=윤왕순 명인장 / 천리장]

[Cook&Chef = 서진영 기자]
장마의 계절, 오래 가는 장을 꺼내다
습한 더위가 지속되면 음식은 쉽게 쉬고 무른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부엌은 이 계절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밥상에 오를 음식을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선조들은 햇볕과 바람, 불과 시간을 다루었다. 말리고, 졸이고, 다시 끓이는 일은 저장을 위한 조리였고, 여름을 건너는 살림의 기술이었다.

천리장(千里醬)은 그 지혜가 담긴 장이다. 이름에는 천 리 길을 들고 가도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양반가에서 귀히 다루던 별미장으로 전해지며, 파평 윤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수되어 온 내림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날 윤왕순 명인의 천리장은 그 집안의 장맛을 바탕으로 계승된 귀한 전통 장이다.

[사진=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증보살림경제: 18세기 중반 의관醫官출신인 유중림柳重臨이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하여 편찬한 농서.]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천리장법
우리가 흔히 장이라 하면 된장, 간장, 고추장을 먼저 떠올린다. 천리장은 그보다 낯선 이름이지만, 고조리서에는 분명한 조리법으로 남아 있다. 1766년 유중림이 편찬한 『증보산림경제』 치선상 장제품에는 천리장법이 전한다. 이미 익은 장을 다시 졸이고, 쇠고기의 감칠맛을 더해 저장성과 풍미를 높인 조선의 전통 장이다.

재료의 중심은 감청장과 한우다. 단출해 보이지만 과정은 만만하지 않다. 좋은 감청장을 고르고, 쇠고기 우둔살의 힘줄과 지방을 걷어낸 뒤 삶고 말려 가루를 낸다. 마지막에는 낮은 불에서 오래 졸여 농도를 맞춘다. 천리장은 빠르게 만들어 내는 양념장이 아니라, 장에 다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별미장이다.

감청장, 오래 익은 콩의 감칠맛
감청장은 천리장의 바탕이다. 햇콩과 오랜 시간 간수를 뺀 질 좋은 소금으로 담근 장은 항아리 안에서 계절을 지나며 익는다. 그 사이 콩의 구수함과 은근한 단맛, 깊은 감칠맛이 우러난다. 짠맛이 먼저 치고 나오기보다 오래 삭은 콩의 맛이 천천히 올라오는 맑은 장이다.

천리장법은 이 감청장을 약한 불에 올리는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감청장이 졸아들수록 물기는 줄고 맛은 조밀해진다. 여기에 삶아 말린 한우를 곱게 가루 내어 넣는다. 고기를 씹기 위한 장이 아니라, 한우의 맛을 장 속에 풀어 넣는 방식이다. 감청장의 콩 감칠맛과 말린 고기의 깊은 맛이 더해지며 일반 간장과는 다른 농도와 향을 만든다.

낮은 불 앞에서 완성되는 맛
장이라 하면 짠맛부터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천리장은 염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간장의 짭조름함이 닿고, 뒤이어 말린 한우의 묵직한 맛이 올라온다. 오래 졸인 감청장의 단맛은 얇게 흩어지지 않고, 걸쭉한 농도 안에서 오래 남는다. 한 숟갈을 떠 보면 묽게 흐르지 않고 천천히 떨어진다. 밥 위에 조금 얹으면 온기에 장향이 풀리고, 밥알 사이로 감칠맛이 스며든다.

많이 넣어 맛을 덮는 양념도 아니다. 흰밥에는 조금만 얹어도 충분하고, 삶은 닭고기나 편육에는 담백한 살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풍미를 보탠다. 오이, 가지, 애호박처럼 수분이 많은 여름 채소와도 잘 어울린다. 천리장은 재료의 맛을 가리지 않고, 부족한 맛의 골격을 조용히 세워 주는 장이다.

습한 여름에 천리장이 어울리는 이유

[사진=윤왕순명인장 / 파평윤씨 가문의 비법인  내림손맛을 재현한 윤왕순명인]


천리장이 지금 같은 계절에 어울리는 이유는 보존의 지혜에 있다. 습하고 더운 날씨는 음식의 맛을 쉽게 무너뜨린다. 선조들은 이 계절 앞에서 더 강한 양념을 찾기보다 물기를 줄이고 맛을 응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감청장은 졸여지고, 한우는 삶고 말라 장 안으로 들어간다. 수분은 덜어내고 맛은 붙잡는 조리다.

천리장은 차게 먹는 여름 음식이 아니다. 더위 속에서 음식을 오래 지키려는 장이다. 장을 다시 끓이고, 고기를 말리고, 낮은 불에서 농도를 맞추는 과정에는 계절을 읽는 감각이 있다. 여름을 피하는 음식이 아니라 여름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장이라는 점에서, 천리장은 지금 이 시기에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한식의 한 갈래다.

파평 윤씨 가문의 내림장, 윤왕순 명인의 고집
천리장은 파평 윤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온 내림장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0호 윤왕순 명인은 천리장으로 지정되었고, 그 장맛을 오늘까지 지켜 왔다. 감청장을 담그고, 한우를 손질하고, 불 앞에서 농도를 맞추는 과정은 짧은 시간에 흉내 낼 수 없다. 한 집안의 장맛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온 명인의 고집이 천리장의 현재를 만들었다.

윤왕순 명인의 천리장은 고조리서 속 이름을 실제 맛으로 되살린 사례이기도 하다. 책의 조리법은 기록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 맛을 계속 만들어 내는 일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감청장의 익은 정도를 알아보는 감각, 한우를 말리는 시간, 불을 낮추고 기다리는 인내는 수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문헌의 조리법과 가문의 전승, 명인의 손끝이 함께할 때 천리장은 비로소 한 그릇의 장이 된다.

대한민국식품명인 제 50호 윤왕순명인 천리장 조리법

재료 : 소고기(볼기살) 600g, 감청장(甘淸醬: 맛이 달고 맑은 장)  1.8L

조리법
1. 소쿠리에 고운 면보를 깔고 맛이 단 간장을 받친다.
2. 간장을 솥에 넣고 처음에는 센 불에서 끓이다가 끓기 시작하면 약한 불에서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졸인다.
3. 소고기는 기름기와 힘줄을 제거하고 삶는다.
4. 삶아진 소고기는 얇게 썰어 채반에 널어 햇볕에 잘 말린다. 
5. 말린 소고기는 절구에 넣고 곱게 빻은 다음 채에 내려 가루로 만든다. 
6. 소고기 가루를 졸인 간장에 넣고 약한 불로 걸쭉해질 때까지 졸인다. 

장 발효의 시대에 다시 보는 천리장
장 발효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는 지금, 천리장은 잊힌 별미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면서 장은 다시 한식의 중심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 천리장은 발효된 장을 그대로 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감청장을 다시 졸이고, 한우의 맛을 더해 저장성과 풍미를 함께 끌어올린다.

그 맛은 조미료로 만든 빠른 감칠맛이 아니다. 햇콩으로 담근 감청장, 오랜 시간 간수를 뺀 소금, 삶아 말린 한우, 낮은 불 앞에서 기다린 시간이 맛의 전부다. 좋은 원물과 잘 익은 장만으로도 음식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 천리장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더 넣느냐가 아니라,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을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가깝다.

여름 밥상에 필요한 것은 때로 강한 자극이 아니라 맛을 정리해 주는 장 한 숟갈이다. 천리장은 재료를 허투루 쓰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깊게 쓰는 조리의 태도를 일러 준다. 습하고 더운 계절, 천리장을 다시 꺼내는 일은 오래된 장맛을 맛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선조들이 계절을 읽고 음식을 지켜 온 방식, 그리고 윤왕순 명인이 한 집안의 장맛을 오늘까지 지켜 온 시간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Cook&Chef / 서진영 기자 cnc02@hn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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