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영의 한식탐구] 영조가 먹던 순창 고추장은 지금의 고추장이 아니었다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2026-03-13 22:41:04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봄이 되면 장을 담그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된장과 간장뿐 아니라 고추장 역시 한국 발효 식문화의 중요한 축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고추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은 전라북도 순창이다. 순창 고추장은 오랫동안 한국 고추장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을 따라가 보면, 영조가 즐겨 먹었다고 알려진 순창 고추장은 지금 우리가 먹는 순창 고추장과 같은 형태의 장이라기보다 당시 발효 장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고추장이었다.
고추장이 문헌에서 분명하게 등장하는 시점은 18세기다. 조선 후기 농서인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1766)에는 고춧가루를 사용해 만드는 장인 ‘만초장(蠻椒醬)’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만초는 고추를 뜻하는 말로, 만초장은 오늘날 고추장의 초기 형태로 이해된다. 이 기록은 고추가 단순한 향신료를 넘어 장류 제조에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당시 고추장은 메주를 기본으로 곡물을 섞어 발효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메주가루에 쌀이나 찹쌀가루를 섞고 엿기름 물이나 조청을 더해 발효를 유도한 뒤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어 숙성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조법은 오늘날의 고추장과 비교하면 메주 비율이 높고 발효 풍미가 강한 장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순창 고추장이 조선시대부터 명성을 얻었다는 기록은 이시필의 《소문사설》에서 확인된다. 이 책은 영조 시대 어의였던 이시필이 여러 생활 지식과 음식 정보를 기록한 책으로, 그 안에는 당시 이름난 음식과 조리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식치방’ 부분에는 지방에서 유명한 음식과 조리 비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순창 고추장이 언급된다. 이는 순창의 고추장이 이미 조선 후기에는 뛰어난 장류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순창 고추장이 명성을 얻은 배경에는 지역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순창은 내륙 분지형 기후로 일교차가 크고 비교적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장류 숙성에 유리한 조건으로 알려져 있다. 장독을 이용한 전통 발효에서는 기온 변화와 공기의 흐름이 중요한데, 순창 지역은 이러한 조건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장 담그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이 궁중에 진상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에서 품질이 뛰어난 음식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궁중에 알려지고 왕실 음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순창 고추장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중에 알려진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영조가 순창 조씨 가문의 고추장을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은 순창 고추장의 명성이 당시에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선시대의 순창 고추장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순창 고추장과 동일한 형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고추장은 메주 중심 발효 장으로, 지금의 고추장보다 된장에 가까운 발효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단맛도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고, 장독에서 장기간 숙성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순창 고추장의 모습은 근대 이후 식품 산업과 지역 브랜드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특히 20세기 이후 장류 생산 방식이 크게 변화하면서 고추장의 제조 방식도 달라졌다.
일제강점기 이후 장류는 점차 가정 중심 생산에서 시장 중심 생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을 집에서 담그던 방식에서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제조 공정이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장류는 점차 상품화되었고, 지역 특산품으로 인식되는 흐름도 나타났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식품 산업이 성장하면서 고추장의 생산 방식은 더욱 변화했다. 공장 생산 체계가 도입되면서 발효 기간이 단축되고 제조 방식이 표준화되었다. 또한 찹쌀과 전분의 비율이 높아지고 조청이나 물엿을 이용해 단맛을 강화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고추장은 집집마다 담그는 장에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식품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순창 고추장이 지금처럼 전국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이 시기 전라북도와 순창군은 장류 산업을 지역 특산 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이 조성되고 장류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순창은 한국 장류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전통 장 담그기 기술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현대 식품 기술을 접목한 생산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순창 고추장은 지역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순창 고추장은 전통 발효 장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현대적인 상품성을 갖춘 식품으로 재구성되었다. 즉 오늘날 우리가 먹는 순창 고추장은 조선시대 순창 고추장의 명성과 계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 산업과 식품 기술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조가 먹었던 순창 고추장과 오늘날의 순창 고추장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만 동일한 음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의 고추장은 메주 중심 발효 장이었고 집안마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장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고추장은 산업화된 제조 공정과 지역 브랜드 전략 속에서 형성된 현대의 발효 식품이다.
봄은 여전히 장을 담그는 계절이다. 된장과 간장을 담그던 전통처럼 고추장 역시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장 문화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고추장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통의 맛’ 역시 시대 변화 속에서 계속 다시 만들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사랑한 순창 고추장은 지금의 순창 고추장과 같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한국 발효 식문화가 지나온 시간을 담고 있는 음식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Cook&Chef / 서진영 전문기자 cnc02@hnf.or.kr
[ⓒ 쿡앤셰프(Cook&Chef). 무단전재-재배포 금지]